[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투박을 출발, 콜로라도 강으로-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1775년 10월 23일 월요일부터 27일 금요일까지 (호르카시타스 출발 25일부터 29일까지)
일행은 산타크루즈 강을 따라 15마일 가량 전진했다. 날이 저물자 일행은 라카노아 (La Canoa)에서 야영했다. 일명 하시엔다 디 라 카노아 (Hacienda de la Canoa)라고 부르는 이곳은 본래 목장이었다. (* 이후 이곳은 디 안자의 탐험대가 머문 곳으로 유명해졌다) 그날밤 이주대의 한 젊은 여인이 분만의 진통을 호소했다. 갑작스런 진통으로 천막 하나를 분만실로 준비하고 경험있는 산파들이 분만을 도왔다. 그러나 난산 끝에 태어난 아기의 골반에 상처가 나고 또한 산모도 부상을 입어 결국 산모는 분만 다음날 사망했다. 밖은 밤새 비가 내렸다. 사망한 산모를 위해 종군 사제들이 공동으로 경건한 영결미사로 영혼을 위로했다. (* 이날 태어난 아기는 탐험대가 1776년 1월 산가브리엘에 도착한 직후 끝내 산가브리엘에서 사망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일행은 그 날 2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 12마일 가량 전진했다. 가르세 신부는 병사 4명을 인솔, 사망한 젊은 산모의 유해를 18마일 거리의 산하비에르 델 박 선교원으로 운구한 후 직접 영결미사를 집전했다.
유명을 달리한 산모는 선교원 묘지에 안장됐다. 가르세 신부가 젊은 산모의 영결미사를 집전할 즈음, 일행은 푼타 디 로스라모스 (Punta de los Llamos)를 지나는 중이었다. 얼마후 일행은 산하비에르 델 박에 도착했다. 아이하츠 신부는 1775년 10월 25일 수요일, 이제는 어머니가 없는 영아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그리고 폰트 신부는 10월 26일 대원중 결혼하는 3쌍의 남녀에게 혼배성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서 12마일 가량 전진했다. 이동하는 대원과 많은 가축으로 일행은 한시간 동안 고작 1마일 정도 전진했다. 그리고 당시 산하비에르 선교원의 공소인 이지역 마지막 기독교 마을인 오늘의 투산 (Tucson)인 투키손 (Tuquison) 북쪽에 야영장을 차렸다. 먼 길을 지나는 대원들은 한밤중 야영장에 모닥불을 피우고 모닥불 옆에 자리하고 정답게 담소하며 앞으로 전개될 화려한 신천지에 대한 미래를 꿈꾸며 담소했다. 이처럼 시간을 보내다 총총한 별이 쏟아지면 일행은 누군가의 기타나 아코디온 소리에 따라 몸을 흔들며 지리한 여행을 달랬다. 흥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대원들은 항상 긴장한 채 혹시나 닥칠 아파치들의 약탈에 대비했다. 다음날 오전 8시 30분 출발한 일행은 12마일 가량 전진한 후 오늘의 투산 북쪽 너른 평원에서 야영했다. 투산은 소노라 변방의 마지막 원주민과 기독교인 사이에 보금자리를 튼 마을이었다. 평평한 평원에 자리잡은 투산에 사는 피마인들은 자주 너른 평원을 누비며 약탈을 일삼는 아파치들의 제물이 되곤 했다. 그래서 애써 모집한 노새몰이꾼도 아파치가 두려워 달아나기 일쑤였다. 다행히 디 안자 사령관은 많은 가축을 몰고 호르카시타스를 출발한 이래 아파치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1시 일행은 북북서를 향해 다시 먼 길을 나서 15마일을 전진한 후 날이 저물 무렵 피마인들이 매질당한 언덕 (Plain of the lashed)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야영했다. 한밤중 6명의 피마인들이 탈영한 노새몰이꾼을 잡아왔다. 디 안자 사령관은 여타 노새몰이꾼에 대한 본보기로 잡혀온 노새몰이꾼을 매질한 후 구금했다.
1775년 10월 28일 토요일부터 11월 1일 수요일까지 (호르카시타스 출발 30일에서 34일까지)
10월 28일 일행은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서-북서쪽을 향해 걸었다. 우기철이 지나서인지 길은 먼지가 많이 일고 물웅덩이의 물은 많이 줄어든 듯했다. 일행은 이날 18마일을 전진했다. 그리고 다시 물웅덩이에 물이 가득 찬 파파고 원주민 마을인 오이타파아트 (Oytaparts)에 야영장을 차렸다.디 안자는 이곳을 옛 마을이라고 불렀다. 웅덩이 물은 300여명의 대원들과 800마리가 넘는 가축이 마시고도 남을 만큼 넉넉했다. 10월 29일 일요일 아침 투산에서 4명의 피마인들이 왔다. 이들은 2번째 탈영한 노새몰이꾼을 포박해 왔다. 첫번째 잡혀온 탈영자에게 벌칙으로 25대의 매질을 선고했던 디 안자는 ‘폭력에 의한 원주민 여인 겁탈과 절도, 협박범은 정당방위를 제외하고 엄하게 다스린다’고 했다. 이번에 포박해온 탈영자에게도 똑같은 매질을 선고했다. 이어 디 안자는 탐험대가 지나야할 힐라강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낯선 탐험대가 지나간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알리려 피마인 4명을 앞서 보냈다. 일행은 늦으막하게 야영장을 정리한 후 북서쪽으로 15마일 가량 나아갔다. 일행은 유령마을이 된 파파고 원주민의 큐이토아 (Cuitoa)를 지나 오늘의 피카초 피크 (Picacho Peak)인 타카 (Taca)산 기슭에서 야영했다. 근처 토양은 메마르고 물웅덩이도 거의 보이지 않고 가축들이 뜯을 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10월 30일 월요일 일행은 다시 북서-북을 향하여 다시 지루한 행진에 나섰다. 하늘은 수정처럼 맑고 또 멀리 지평선에는 희끄무레한 산봉우리가 어른거렸다.
1775년 10월 30일 힐라강에 도착
일행은 비교적 걷기 편한 길을 6시간 만에 근 24마일을 걸었다. 그러나 일행이 얼마쯤 전진하자 길 표면의 흙은 동물의 발자욱에 의해 먼지로 변했다. 흰 먼지는 걸친 옷이며 피부 등 온 전신에 하얗게 달라붙었다. 뒤따르는 가축들도 해를 가릴 정도로 일어난 흙먼지로 허옇게 변했다. 가축이고 대원이고 모두 숨쉬기도 힘들었다. 흙먼지를 뚫고 어느정도 전진하자 먼지로 뒤덮혔던 하늘은 점차 푸르렀다. 선발대로 출발했던 피마 원주민들이 알렸는지 원주민 고위 무속인을 포함하여 쿠이토아와 아퀴투니 (Aquituni) 파파고 마을의 원주민 지사, 유트리스 (Uturituc) 피마 마을의 시장, 수타퀴산의 지사 등이 말을 타고 몸소 일행을 영접하러 마중나왔다. 이들은 말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그리고 전날 벗긴 사망한 아파치 전사의 머릿 가죽 2개를 선물로 바쳤다. 이들은 다시 말에 오른 후 일행을 위치가 좋은 야영장으로 안내했다. 늦은 오후 일행은 차갑고 맑은 물이 도도히 흐르고 느릅나무가 길게 늘어선 푸른 제방에 둘러쌓인 힐라 (Gila)강변에 도착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대원들이 전날 무리하게 행진했다하여 31일 화요일 하루를 온종일 휴식하도록 했다. 그리고 디 안자와 가르세 신부 등 3명의 사제는 까사그란데의 몬테주마 (Moctezuma) 고대유적을 관람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