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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선교원이 불타고 있다 디 안자, 폭동으로 탐험 일정 지체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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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메에야 원주민이 처음 스페인 측을 공격한 것은 1769년 세라 신부가 산디에이고 해변에 처음 나타났을 때였다. 낯선 배가 해안에 들어서자 쿠메에야 원주민 전사들은 화살을 날리며 부족의 영토를 침범한 세라 신부가 탄 선박을 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으로 세라 신부를 시중 들던 바하 캘리포니아 출신 사환이 살해되었다. 그 이후에도 원주민들은 종종 이전한 선교원 측을 공격하는 등 괴롭혔으나 그 피해는 경미했다.

갑자기 늘어난 천연두와 각종 전염병
쿠메이야 부족이 스페인 정착민에게 격노한 것은 이방인들에 의해 전파된 전염병도 이유가 되었다. 천연두 같은 전염병에 전혀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스페인 같은 유럽인들이 전해준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산디에이고 일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같은 전염병은 주로 원주민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쿠메이야 원주민들도 점차 이 같은 전염병에 회생자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실제 1700년대 말 산디에이고 주변 원주민의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 수는 1,000명당 56명이었다. 이는 같은 시기 캘리포니아의 78명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원주민들의 불안은 컸다.
쿠메이야 부족은 1775년 여름 인근 타 부족과 함께 일제히 들고일어날 예정이었다. 당시 콜로라도 강변 원주민을 상대로 전교하던 가르세 신부는 폭동에 가담할 것을 권하는 전령들이 부지런히 콜로라도 강변 원주민 마을을 오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여름 일어날 줄 알았던 폭동은 11월 5일에야 일어났다.

25개 부락 중 15개 부락이 폭동에 가담
끔찍한 원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난 지 약 두 달 후, 약 450마일 거리의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 겸 몬트레이 수비대장 페르난도 리베라 몬카다(Jose Fernando Rivera y Moncada)가 호세 프란시스코 오르테가(Jose Francisco Ortega: 1734 멕시코 셀라야에서 출생 - 1798년 2월 3일 산타 바아바라 해변에서 사망) 중위와 12명의 병사들과 함께 불타버린 산디에이고 선교원에 나타났다. 그는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주모자 체포에 나섰다.
우선 오르테가 중위가 혐의자 심문에 나섰다. 오르테가 중위는 나이 21세에 군에 입대한 후 근 16년을 사병으로 지냈다. 그의 우직스러운 충성심과 근면으로 전임 페이지(Fages) 총독은 그를 장교로 선임했다. 1798년 2월 산디에이고 수비대장으로 복무 중 산타 바아바라 해변에서 사고사했다.
오르테가 중위의 탐문과 심문에 의해 쿠메이야의 25개 원주민 부락 중 15개 부락의 원주민 600여 명이 적극적으로 폭동과 약탈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에는 기독교로 개종한 소위 기독교 부락으로 알려진 산루이스(San Luis), 하마차(Jamacha), 메티(Meti), 라푼(La Punta), 하나트(Janat), 아브스퀠 (Absquel), 마카테(Macate) 등 8개 원주민 부락과, 비기독교인 부락인 치아프 (Chiap), 멜레호(Melejo), 우타이(Utay), 코후아트(Cojuat), 타핀(Tapin), 쿨라막 (Cullamac) 등 6개 부락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폭동의 주모자는 마카테 부락의 오로치(Oroche)와 쿠라막 부락의 프란시스코(Francisco), 하나트 부락의 라파엘(Rafael), 아브스퀠 마을의 이스퀴틸(Ysquitil) 등 4명으로 밝혀졌다. 이 중 두 명의 주모자는 영세한 기독교인으로 밝혀졌다. 이들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에는 평소 이방인에 불만이 많던 주술사들의 선동도 한몫했다.
몬카다 총독은 죄질에 따라 모두 법정에 세웠다. 죄질이 무거운 13명의 폭도는 모두 수비대 영창에 구금했다. 또한 주모자 중 죄질이 강한 2명은 바하 캘리포니아의 로레토(Loreto) 수비대 영창에 각각 분리하여 구금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선교원 주위 36마일 반경의 원주민 마을 25개 중 14개 마을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7개 마을은 소극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루이스 하메이 신부는 1770년 9명의 사제들과 함께 신세계 뉴스페인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5년 후, 1775년 11월 35세의 젊은 나이로 캘리포니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76년 1월 5일 금요일부터 1월 16일 수요일까지(호르… 출발 99일부터 104일째) 
분노한 원주민들이 산디에이고 선교원을 불태울 당시, 몬트레이 수비대장은 리베라 몬카다(Fernando Rivera y Moncada: 1725 Compostela에서 출생  – 1769, 7.18 콜로라도 강에서 사망)였다. 나이 50의 건장한 체격의 몬카다는 스페인과 멕시코의 혼혈이었다. 그의 부친은 전형적인 관료였다.
그리고 디 안자의 탐험대가 힐라 강의 강변을 따라 콜로라도 강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무렵, 산디에이고에서는 끔찍한 폭동이 일어났다. 멕시코 혼혈인 몬카다는 자신의 출세길을 군인에 걸었다. 스페인을 비롯한 국내외의 여러 전투에 참전한 몬카다는 싸움터에서 뛰어난 공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나이 27살에 당시 오지 중의 오지 바하 캘리포니아의 로레토(Loreto) 수비대장이 되었다. 황실에는 변함없는 충성심과 깊은 신앙심, 그리고 부하들에게는 따사로운 자애심으로 군과 민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근 30여 년간 로레토 수비대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몬트레이 수비대장으로 영전하고, 디 안자가 제1차 탐험 중 몬트레이 수비대 방문 당시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산디에이고의 쿠메이야 원주민이 폭동을 일으킨 후 처음으로 산 가브리엘 선교원을 방문하고 디 안자와 탐험대원을 영접했다. 그는 1776년 1월 4일 선교원 사제 미구엘 산체스(Miguel Sanchez)와 안토니오 크루자도(Antonio Cruzado)와 함께 선교원의 정문을 나와 투박 인근 호르카스시타를 출발하여 98일 만에 도착하는 디 안자 사령관과 300여 명의 정착민 겸 탐험대원을 환영했다.
마침 산가브리엘 선교원 측에서는 그의 도착을 기리는 낭랑한 종소리가 울리고 병사들의 환영 축포 소리는 하늘을 울렸다. 선교원 측은 이날 양, 돼지 등 가축 4마리를 잡아 장거리 여행에 탈진한 300여 명의 탐험대원들을 환영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종군 사제 폰트(Font)는 이날 즐긴 양고기는 이제까지 먹어 본 양고기 중 제일 맛있었다고 극찬했다.
산 가브리엘 선교원 주위에는 야생 양상추, 양배추는 물론 포도나무와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가 탐스러운 열매를 자랑했다. 모하비 사막을 지낼 때 그토록 귀하던 땔감도 지천인 캘리포니아는 정말 “약속된 축복의 땅”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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