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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선교원이 불타고 있다 디 안자, 폭동으로 탐험 일정 지체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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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보다 유랑 생활을 즐기는 원주민
산가브리엘 선교원 사제들은 강압적으로 원주민들의 개종을 서두르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선교원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이곳 원주민들은 완전 야생적인 삶을 즐겼다. 이들은 한 장소에 정착하기보다는 들짐승처럼 초원이나 너른 들판, 그리고 야산을 떠돌며 사는 방법을 즐겼다. 만약 이들이 하느님 품을 찾는다면 야성적인 옛 생활 습관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선교원 측은 개종한 후 전에 살던 부락이나 야산, 초원으로 달아나면 추적하여 벌을 주었다.
개종을 택한 원주민들은 주로 너른 선교원 한편에 마련한 초옥에 부락을 이루고 생활했다. 사제들은 이들에게 2~3개월간 십자 성호를 긋는 방법이나 의미, 그리고 기본 교리를 가르쳤다. 이 같은 기본 교리를 인내를 갖고 자진해서 받아들인 원주민에게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영세를 베풀었다. 영세를 받은 개종한 원주민들은 보통 해 뜰 무렵부터 사제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 미사가 없는 날이면 해 뜨는 시간에 기상하여 사제의 인도에 따라 일정 장소에 모여 성가를 읊조리고 기도를 바친 후 오트밀이나 보리, 그리고 콩으로 요리한 죽 ‘포졸(Pozole)’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사제의 인도에 따라 지정된 장소에서 단체로 작업을 했다. 정오가 되면 일행은 콩이나 옥수수 그리고 보리에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함께 요리한 ‘포리지(Porridge)’로 점심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해가 질 때까지 배정된 작업을 마친 후 저녁 식사 후 성가와 기도로 하루를 마감했다.
선교원 영내에 거주하는 기독교 영세를 받은 원주민과 비영세자는 입은 옷부터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음식도 달랐다. 영세자에게는 선교원 측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대신 비영세자는 부락 단위로 보통 돼지고기나 닭고기가 빠진 곡류로 조리한 단순한 ‘포리지’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정착보다는 들짐승처럼 자유로운 유랑 생활을 즐기는 원주민들은 한번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원주민들은 고향을 방문하거나 도토리를 줍는다는 이유로 사제로부터 며칠간 외출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외출한 원주민들은 대부분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은 돼지고기나 닭고기가 들어간 죽보다 나무의 씨앗이나 선인장 열매, 연한 풀, 부드러운 갈대의 순, 나무 열매를 더 즐겼다.

30여 병사와 함께 주모자 체포에 나서다
디 안자 사령관과 몬카다 총독은 폭동 뒷수습을 놓고 오랜 시간 협의했다. 두 사령관은 일벌백계로 주모자는 끝까지 추격하여 체포한 후 엄벌에 처하기로 했다. 디 안자는 12명의 병사를 지휘하여 산디에이고 수비대를 찾은 몬카다 사령관을 지원하기로 했다.
1776년 1월 7일, 디 안자 사령관과 폰트 종군 사제와 30여 명의 병사들은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서 126마일 거리의 산디에이고 수비대 겸 선교원으로 말을 달렸다. 애리조나의 호르카시타스를 출발한 지 근 100여 일 만이다. 디 안자와 병사들은 생기 있고 튼튼한 말을 골라 타고 몬카다 사령관과 함께 말을 달렸다. 디 안자 사령관의 빈자리는 모라가 중위가 대신하기로 했다.
7일 산 가브리엘의 날씨는 강한 북서풍이 일행을 뒤에서 밀었다. 그러나 하늘은 청명했다. 어린이나 여인네가 빠진 탓인지 일행은 번개처럼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첫날 일행은 7시간 만에 30마일을 달려 산타아나(Santa Ana)에 도착했다. 1769년, 지금보다 7년 전 초대 알타 캘리포니아 총독 개스퍼 포톨라가 다듬은 길은 말을 달리기에는 아주 쾌적했다.
일행은 매일 평균 42마일씩 이틀간 산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 산디에이고를 향해 말을 몰았다. 디 안자와 몬카다 사령관은 선교원을 신축하다 원주민의 저항으로 중단된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를 지나 근처 강가에서 야영했다. 1월 10일 일행은 거의 36마일을 달렸다. 그리고 그날 산디에이고 근방 기독교인들의 마을인 솔다드(Soledad)에 도착했다. 이들이 마을에 도착하자 추장은 일행의 도착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이들 앞에서 화살 3개를 부려뜨렸다.

1776년 1월 11일 목요일(호르카 출발 105일째)
일행은 11일 아침 7시 30분 강한 북동풍을 뒤로하고 산디에이고를 향해 말을 달렸다. 출발 3시간 만인 오전 10시 반경, 일행은 산디에이고에 도착했다. 쿠메이야 원주민 폭동이 일어난 지 2개월여가 지났지만 불타버린 옛 선교원 주위는 아직도 타다 남은 잔해로 어지러웠다. 근처 야산의 산 그림자가 늘어선 불타버린 옛 선교원은 고르지 않은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했었다. 선교원은 이제는 가뭄으로 물이 흐르지 않는 산디에이고 강줄기를 따라 3마일, 그리고 바다에서는 6마일 거리에 있었다.
1769년 7월 16일, 산디에이고 수비대 한편에 선교원은 마련했으나 이후 농장과 목장 운영이 유리한 쿠메이야 부족 영토로 이전했다. 그러나 1774년 새로 들어선 새 선교원은 원주민 부족 마을 바로 이웃에 자리 잡았다. 이 같은 처사는 자연히 원주민들의 저항을 샀다. 원주민과 교류가 자유스러운데 반해 마찰도 잦았다. 이것이 이번 폭동의 빌미가 되었다.
디 안자와 몬카다 총독이 일행과 함께 불타버린 산디에이고 선교원에 도착했을 때, 휴스터 신부와 살아남은 원주민 선교원 시종과 수비병, 그리고 용감하게 병사들과 함께 폭도들에게 대항했던 산디에이고 수비대 대장의 아들과 조카는 막 도착한 일행을 환영했다. 폭도들은 마음껏 약탈을 자행한 후 날이 밝자 마을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며칠간 날이 어두워지면 수비대 근방에 다시 나타나 남은 병사와 일부 정착민을 위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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