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선교원이 불타고 있다 디 안자, 폭동으로 탐험 일정 지체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1월 26일 금요일부터 1월 31일 수요일까지 (호르… 출발 120일부터 125일까지)
26일 첫 새벽, 조용히 수비대를 빠져나갔던 병사들은 추장과 폭도에 동조한 혐의가 있는 여인네들까지 포함된 9명의 혐의자를 포박한 채 산디에이고 수비대로 돌아왔다.
아직도 원주민 마을의 추장은 부락민에게 영향력이 강했다. 심문 결과, 이중 2명의 남성은 최근 영세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수색대는 혐의가 의심되는 폭도들에게 심한 매질과 심문 끝에 이들이 약탈해간 성물 중 일부와 또 사제들의 제의를 되찾았다.
수색대는 “차후 주모자를 숨겨주거나 이들과 모의한 사실이 밝혀지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다”고 엄히 경고했다. 이중 죄질이 무거운 2명은 구속하고, 나머지 혐의자는 모두 방면했다.
1월 27일 한밤, 수색대는 다시 출동했다. 수색대는 주요 주모자인 카를로스가 라 솔다드(La Soledad)의 원주민 부락에 숨어있음을 확인했다. 수색대는 조용히 마을로 잠입한 후 그가 달아나기 전에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행방은 계속 오리무중이었다.
수색대는 추장을 엄히 추궁했다. 그러나 추장은 이 마을에 카를로스가 숨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그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할바 상사는 카를로스는 분명 “이 마을에 숨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마을에 없다면 “아마도 수색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 마을을 빠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리할바 상사는 폭도들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되는 자들을 체포한 후 매질하고 “만약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 폭도들과 똑같이 취급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수색대는 3일간 더 머물렀으나 더 이상 주모자에 대한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2월 1일 목요일부터 2월 4일 일요일까지 (호르… 출발 126일부터 129일까지)
2월 1일, 몬카다 총독은 산디에이고 원주민 폭동 전 과정과 지금까지의 진압 과정을 보고할 5명의 연락병을 산디에이고에서 약 870여 마일 거리의 멕시코 뉴스페인 총독에게 보냈다. 폭동이 일어난 지 근 3개월여 만이다.
연락병은 디 안자 사령관의 제2차 탐험 과정도 보고하는 서신과 폰트 신부가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서신도 휴대했다. 당시 알타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시티의 뉴스페인 총독에게 보내는 서신은 일차로 최북단에 위치한 벨리카타(Velicata)에 도착하면, 벨리카타에서 대기하는 신선하고 튼튼한 말로 갈아타고 또 달렸다.
5명의 연락병은 3일 토요일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멕시코로 향한 전령은 디 안자 사령관이 산디에이고에서 3주간 폭동 주모자를 수색하는 사이, 산가브리엘 선교원에서 근 한 달간 대기 중인 300여 명의 탐험대원이 양식 부족으로 겪는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임시 지휘관 모라가 중위의 호소문을 갖고 다시 말을 달렸다. 전령은 모라가 중위가 “선교원에는 8일 정도 버틸 양식밖에 없다”는 호소문을 휴대했다.
산가브리엘 선교원에는 새로 영세한 후 선교원 영내에 거주하는 신자에게는 음식을 배급할 수 없었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정량보다 적은 음식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산가브리엘의 형편은 자연히 디 안자 사령관과 몬카다 총독에게도 전달되었다.
당시 두 사령관은 어느 정도 폭동이 진압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령이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잠시 머물면서 디 안자의 탐험대원이 아직도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머문다는 사실을 뉴스페인 총독에게 알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사실에 두 사령관은 당황했다.
이 사태에 당황한 총독은 우선 옥수수와 콩 등 구호 양식을 급히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노새 등에 실어 보냈다. 그리고 병사 20명과 그 가족을 몬트레이 수비대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또한 병사들은 산타바바라까지 이동하는 대원을 경호하는 동안, 디 안자는 틈을 내어 샌프란시스코 만을 탐험할 해협을 찾아보기로 했다.
2월 4일, 벌레 먹고 질이 낮은 콩과 옥수수를 실은 노새 무리가 산디에이고 수비대를 떠나 산가브리엘 선교원으로 향했다.
2월 5일 월요일부터 2월 12일 월요일까지 (호르… 출발 130일부터 137일까지)
디 안자 사령관이 몬카다 총독의 간곡한 요청으로 산디에이고 원주민 폭동 배후 주모자 처리를 위해 지원왔다고 해도, 두 사람 간에는 항상 긴장감이 흘렀다.
몬카다 총독 겸 몬트레이 수비대장은 알타캘리포니아를 원주민들로부터 완전 방어하기 위해서는 현 병력으로는 역부족하다고 생각해왔다. 그간 별다른 과오 없이 승승장구한 몬카다 입장에서는 이번 산디에이고 원주민 폭동과 그 뒷처리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대처했다.
그는 디 안자 사령관의 샌프란시스코 만 정착은 현 시점에서는 위험하고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디 안자를 지원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는 자칫 디 안자의 샌프란시스코 정착이 자신의 경력에 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몬카다 총독은 프란시스코 교단으로부터 알타캘리포니아 일대에 더 많은 선교원을 세워달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멕시코의 뉴스페인 총독은 디 안자의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의 스페인 정착촌 건설에 적극 협조하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았는가. 이미 몬카다 총독은 이 두 가지 과제는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산디에이고 원주민 반란은 성공리에 폭동을 진압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경력에 큰 오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디 안자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 정착촌을 성공적으로 건설한다면 스페인 측이 알타 캘리포니아 일대를 선점할 수 있고, 자신에게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디 안자는 몬카다 총독이 이번 사태를 두고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착촌 건설을 위해 몬카다를 압박하여 당초 계획대로 임무를 완성하기로 했다.
디 안자는 원주민 진압을 계속하면서 우선 몬트레이 일대에 정착촌을 세우고, 샌프란시스코 만에는 차후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두 사령관은 산가브리엘 선교원에서 원주민 폭동 진압 잔무 처리를 협의하기로 했다.
두 사령관이 진심으로 이견을 좁히려 협의했다 해도, 두 사람 간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틈이 벌어졌다.
디 안자는 당시 몬카다 총독이 멕시코 총독에게 일찍이 샌프란시스코 만에 정착촌을 건설하려는 자신의 탐험을 적극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폰트 종군 사제는 이에 대해 “디 안자 사령관은 이때부터 몬카다 총독에 대한 자비심을 영원히 거두었다”고 밝혔다.
자리를 함께한 두 사령관은 폭동 주범 처리 등 일체의 작전에 대해 협의했다. 몬카다 총독도 디 안자 사령관이 5일 월요일 산디에이고를 출발한다는 통고를 어정쩡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5일, 강풍을 동반한 장대비가 하루 내내 내렸다. 인근 냇물의 물살은 거세게 흘렀다. 디 안자 일행은 비가 잦아들 때까지 4일간 출발을 지체했다.
9일 금요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디 안자는 냇물의 수위가 손바닥 6개 깊이로 흐르는 가운데도 산디에이고를 출발했다.
11일 일요일, 일행은 산타 아나(Santa Ana)에 도착했다. 구호 양곡인 옥수수와 콩을 싣고 먼저 출발한 노새 무리를 산타 아나에서 만났다.
12일 월요일 오후, 디 안자와 일행은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오랜만에 들어섰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구호 양곡을 실은 노새 무리도 도착했다.
폰트 신부는 “산디에이고에서 산가브리엘까지 126마일을 달리는 동안 산과 언덕 125개를 넘었다”고 기록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