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일행은 산타바아바라 해협을 따라 약초 밭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디 안자 사령관이 탈진한 대원들을 지휘하여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 도착하기 4일 전, 대륙군 총사령관 조오지 워싱턴 장군은 대서양 연안 보스턴에서 영국군과 밀고 당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13개 별 모양에 13개의 붉고 흰 줄이 그어진 합중국 국기를 휘날리는 대륙군은 세인트 조오지와 세인트 안드류를 건너 보스턴의 프러스펙트 힐 (Prospect Hill)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였다.
3일 후, 대륙군은 보스턴 앞바다에 진을 친 함정 위에 대륙군 깃발을 휘날렸다. 북미 대륙에 터를 잡고 생활하는 개척민들은 영국 왕실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조심스레 대륙군과 왕실군 양측의 눈치를 살폈다.
당시 지상 최고의 낙원으로 꼽히던 알타캘리포니아는 절대 지배자가 없는 무주공산이었다. 일찍이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자리에 세운 ‘뉴 스페인’은 소노라와 시날로아 일대에서 사나운 아파치 부족에 막혀 더 이상 북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다행히 키노 신부가 알타 캘리포니아로 가는 육로를 발견하면서, 그때까지 외딴 섬으로 믿어왔던 북미 대륙에 유럽인의 발길이 빈번해지게 되었다.
드넓은 태평양과 맞닿은 알타 캘리포니아는 북미 대륙의 대서양 연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와 뉴잉글랜드는 값비싼 비버 모피를 탐내는 프랑스 모피상들의 탐욕으로 오염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한 대영제국이 뉴욕, 보스턴 등 뉴잉글랜드에 정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패권 전쟁은 세기를 넘나들었고, 여기에 곰 같은 러시아도 끼어들었다. 유럽 대륙의 모피 상권을 독차지했던 러시아는 마침내 시베리아는 물론, 급기야 알래스카까지 사냥감이 마르자 캐나다를 넘보다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했다. 러시아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소노마 카운티의 러시안 리버 근방에 정착지를 마련하고 비버잡이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곳은 본국과 너무 멀어 관리가 어려웠다. 결국 러시아가 철수했지만,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는 계속 북미 대륙에 군침을 삼켰다.
알타 캘리포니아에 대한 영토권을 처음 공표한 나라는 스페인 제국이었다. 1542년 까브리요는 오늘날의 샌디에이고 만(內港)에 기항하여 3일간 머물며 이 일대를 ‘위대한 스페인 황제의 소유’라고 공표했다. 그 후 뉴스페인은 콜로라도와 힐라 강을 경계로, 사나운 아파치족에 의해 진로가 막혀 더 이상 ‘거대한 섬’이라고 알려진 알타캘리포니아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키노 신부가 알타캘리포니아는 섬이 아닌 대륙이라는 사실을 육로로 증명하면서 무주공산 캘리포니아를 지배하려는 구미 각국의 혈전은 더욱 심해졌다.
산디에이고까지 ‘엘 까미노’를 개척하다
스페인 제국은 일찍부터 제국의 영토인 알타캘리포니아 선점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육상으로 막혔던 알타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 키노 신부에 의해 밝혀지면서, 바하캘리포니아를 통해 산디에이고로 향하는 ‘엘 까미노’를 개척한 스페인은 알타캘리포니아 선점에 나섰다.
바하캘리포니아 초대 지사였던 개스퍼 포톨라(1713~1784)와 이후 알타 캘리포니아에 21개 선교원을 세운 후니페로 세라(1723.11.24~1784.8.28, 몬터레이 카멜 선교원에서 사망) 신부는 디 안자 1세(1693.6.29~1740.5.9)가 알타캘리포니아 탐험대 보급로 마련차 나섰다가 아파치족에게 전사한 지 29년 후, 그리고 까브리요가 산디에이고 내항에 정박한 지 근 250여 년 만에 알타 캘리포니아 땅을 밟았다. 그리고 디 안자 1세가 1740년 전사한 지 근 35년 만인 1776년 1월 4일, 그의 아들 디 안자 2세가 오늘날 로스앤젤레스인 산 가브리엘 강가에 들어선 선교원에 300여 명의 정착 희망자를 안내했다. 디 안자 2세는 1775년 9월 29일 소노라의 호르카시타스를 출발해 투박을 거쳐 99일 만에 아버지 디 안자 1세의 유업을 36년 만에 이루었다.
1776년 2월 21일 수요일 (호르카시타스 출발 146일째)
2월 21일은 사순절 시작 첫날인 ‘재의 수요일’이었다. 미사 후 오전 11시 30분, 디 안자 사령관과 폰트 종군 사제, 그리고 17명의 병사와 가족들은 약 한 달 반을 체류했던 산가브리엘 선교원을 떠나며, 이별의 섭섭함과 앞으로 맞이할 신세계에 대한 찬란한 꿈이 교차하는 눈물로 만감을 대신했다. 일행은 한발 앞서 북으로 향하는 디 안자를 흐르는 물살처럼 뒤따랐다. 그리할바 상사와 8명의 병사는 혹시 탈영병 체포를 위한 추가 병력 지원이 있을 것에 대비해 가족과 함께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 잔류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모라가 중위의 추가 병력 지원에 대비해, 선교원에 남아 있는 그리할바 상사 편으로 그간 변경된 계획과 식량 지원 요청서를 산디에이고에 체류 중인 리베라 모라가 사령관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5명의 병사와 고용인들이 건강한 말 25필과 다수의 물품을 탈취한 후 탈영했다”며, “모라가 중위와 다수의 병사들이 탈영병 체포를 위해 대기 중인 8명의 병사를 위한 식량 지원이 필요하다”고 리베라 사령관에게 요청했다. 추가 식량 지원을 위해 그리할바 상사는 8명의 병사와 노새를 몰고 리베라 몬카다 사령관에게 한발 앞서 산디에이고로 말을 달렸다.
1776년 2월 22일 목요일부터 24일 토요일까지 (호르카시타스 출발 147일부터 149일까지)
22일 아침 8시, 일행은 오늘날의 글렌데일인 까후엔가(Cahuenga) 산 비탈에 차렸던 텐트를 거두고 출발했다. 계속 전진한 일행은 산타모니카(Santa Monica)산 동쪽으로 향하는 오늘의 101번 도로 서쪽에 들어섰다. 날씨는 유달리 쾌청했다. 참나무와 호두나무가 즐비한 너른 계곡은 온통 녹색이었다. 대지는 걷기 편하고 단단했다. 21마일을 전진한 후 늦은 오후, 일행은 식수를 구하기 쉬운 곳을 찾아 야영장을 차렸다. 23일,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일행은 아침 일찍 출발했다. 산타클라라 계곡에 들어서려면 야트막한 산 언덕을 가로질러야 했다. 대부분 여인과 어린아이들인 대원들은 언덕을 걸어 내려가느라 애를 먹었다. 약 15마일 거리는 위험할 정도로 가파랐다. 오후 늦게까지 일행은 이날 10시간가량 강행군 끝에 목적지였던 산타클라라 강변에 도착했다. 종군 사제 폰트 신부는 “이곳 정상에 오르니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산타바바라(Santa Barbara) 해협에 잇단 섬들이 보였다. 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슴떼가 달리자 흰 구름 같은 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거위, 오리, 두루미 같은 온갖 새들이 강을 하얗게 덮었다. 밝은 대낮에는 완전히 나체의 무장하지 않은 몇몇 원주민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여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해가 지자 먼 바다에서 해무가 몰려왔다. 일행은 담요로 온몸을 두텁게 감싸고 잠을 청했다. 24일 토요일, 일행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까르핀테리아(La Carpinteria) 근방 로스 핀타스(Los Pintas)에 야영장을 차렸다. 이 원주민 마을 이름은 포톨라 지사가 인근 마을을 탐험할 때 지은 이름이다. 원주민 마을은 해안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폰트 신부는 “마을은 해안을 따라 세워졌고, 거의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릴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내륙 출신 대원들 중에는 이같은 망망대해를 처음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