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일행은 산타바아바라 해협을 따라 약초 밭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3월 2일 토요일부터 3월 3일 일요일까지 (호르카… 출발 156일부터 157일까지)
2일 새벽, 디 안자 사령관은 연락병을 6마일 거리의 산 루이스 오비스포(San Luis Obispo) 선교원에 보내 자신을 비롯한 탐험대의 도착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그날 아침 8시경, 일행은 야영지를 출발하여 남동쪽의 선교원을 향해 길을 나섰다. 선교원으로 가는 길은 온통 습지대였다. 노새에 실은 짐을 내려 노새가 쉽사리 습지대를 지나도록 했다. 남녀노소 모두 말에서 내려 습지대를 걸었다. 특히 어린이와 여인들의 고통이 심했다. 또한 선교원 도착이 임박하자 새 옷으로 갈아입었던 여인들의 불평은 더욱 심했다.
일행이 선교원에 도착하자 선교원 측은 종을 울리고 화승총을 쏘아 먼 곳에서 찾아온 탐험대를 환영했다. 일반 사회에서 추방된 것처럼 격리된 채 고독한 생활을 하는 사제와 12명의 병사들은 낯선 외지인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산 루이스 오비스포 선교원의 식구들은 산디에이고에서 일어난 원주민 폭동에 크게 두려워했다. 혹시나 이 같은 폭동이 이곳 선교원까지 번질까 걱정했다. 사실 외부 세계와 절연된 채 정보가 차단된 상태로 생활하는 이들은 제한된 방어력에만 의지한 채 지내야 했으니 당연히 두려웠을 것이다.
산디에이고 선교원 폭동에 떠는 이웃 선교원
약 10주 전, 몬트레이의 리베라 몬카다 사령관은 남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산 루이스 선교원은 무시한 채 지나쳤다. 그 후 오비스포 선교원에는 “산디에이고 선교원의 스페인 정착민은 모두 살해당했다.” “산 가브리엘 선교원의 원주민도 폭동에 가담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콜로라도 강 근방 유마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래도 외지에 유배된 것처럼 격리된 생활을 하는 벽지의 선교원 병사나 일부 정착민은 이 같은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이날 선교원의 피게르(Figuer) 신부는 몸소 정문에 나와 디 안자를 비롯한 탐험대를 환영했다.
폰트 사제는 “산 루이스 오비스포 선교원은 바다에서 약 9마일 거리의 기름진 들판, 산타 루시아(Santa Lucia)산 가까이에 있었다. 주위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가 있었다. 선교원 주변 원주민들의 외모는 수려했다. 이곳 여인들은 앞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남자용 가발을 얹어 뒤로 늘어뜨렸다. 그들은 외모가 단정하고 크고 반짝이는 눈이 특징이었다. 피부색은 약간 검고 창백한 중간색이었다. 스페인 여인들처럼 매력적이었다” 폰트 신부는 기록했다.
이곳의 위도는 북위 35도 17.5분.
3월 3일 일요일, 폰트 사제는 7살 어린이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대부는 디 안자 사령관이었다.
3월 4일 월요일부터 3월 6일 수요일까지 (호르카… 출발 158일부터 160일까지)
아침 9시, 산 루이스 오비스포 선교원을 출발했다. 일행은 산타 루시아 산을 가로질러 수목이 울창한 계곡을 따라 작은 냇물을 끼고 살리나스 계곡으로 들어섰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사로웠다. 시야를 가린 산 둔덕에는 참나무와 월계수나무가 군데군데 위용을 자랑했다. 너른 대지에는 소박한 들꽃이 무성했다.
그러나 이 지방의 동물들은 아리조나 등 남부와는 특이하게 달랐다. 이곳에는 대원들이 처음 보는 새가 있었는데, ‘목수새’라 이름 지었다. 이 새는 참나무 둥지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도토리 알을 저장했다.
일행은 산타 마가리타(Santa Margarita) 샛강을 따라 전진한 후, 몬트레이 근방 라 아숨시온(La Assumpcion)에 야영장을 차렸다. 디 안자 사령관은 이곳에서 목적지 몬트레이까지 약 21마일로 추정했다. 1시간에 3마일을 전진한다면 대략 7시간 거리였다.
디 안자는 다음날 5일 새벽이 밝자 연락병을 보내 카멜 선교원에 탐험대의 도착을 알리도록 했다. 연락병은 새벽 어둠을 뚫고 말을 달렸다. 그러나 디 안자 사령관은 일행이 어디에서 밤을 보냈는지 세세한 내용은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낯선 곳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되도록 이야기를 나눌 거리와 시간을 보장해주기 위함이었다. 유배생활하듯 지내는 선교원 가족들에게 탐험대를 맞이하는 일은 대단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6일 아침, 따사한 햇살이 냇물처럼 일행에게 밀려왔다. 일행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여울목을 건넜다. 그리고 9마일을 지나 북북서로 진로를 잡았다. 일행은 질퍽한 평지를 지나 참나무가 여기저기 우거진 너른 초원인 나시엔토(Naciento) 분지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약 3마일 거리에 또 다른 강이 흘렀다. 일행은 그 강가에서 야영했다. 폰트 종군사제는 산 안토니오(San Antonio) 강 제방에 야영지를 마련했다. 이 강은 산타 루시아 산에서 발원하여 협곡을 따라 흘러왔다. 디 안자는 이곳을 ‘산 안토니오의 건널목 프리메로 바도(Primer Vado)’라고 불렀다.
돼지 두 마리 잡아 일행 환영
다음날 아침 8시, 일행은 프리메로 바도를 건넜다. 좁은 길을 따라 전진하자 또다시 자그마한 여울목 두 개를 만났다. 몬트레이 해변의 화창한 날씨는 친절한 미소처럼 일행을 맞았다.
오후 4시, 일행은 참나무가 즐비한 ‘참나무 협곡(Saint Anthony of the Oak Glen)’에 위치한 산 안토니오 선교원에 도착했다.
선교원 측에서는 도토리를 즐겨 먹어 실하게 살찐 돼지 두 마리를 잡아 찾아온 일행을 환영했다. 돼지기름도 넉넉하게 나왔다.
산 안토니오 선교원은 평평한 대지 위에 단단한 나무 기둥과 흙벽돌로 지어졌다. 평평한 지붕으로 하늘을 가려 여타 선교원보다 튼튼해 보였다. 선교원 중앙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이 있었고, 한편의 큰 방은 성당과 연결되었다.
회관은 넓은 안뜰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곳에는 부엌·화덕과 가축 우리가 보였다.
이곳 원주민 중 하느님의 품에 안긴 신자는 놀랍게도 약 500명이나 되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선교원과는 판이하게 많은 신자들이었다. 이들 신자들은 주로 산타 루시아 산에서 내려온 원주민들이었다. 남정네와 여인들은 모두 자그마한 체구였으며, 외모는 깔끔하기보다는 아름답지 못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피마족 여인들처럼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발음할 때마다 쇳소리가 섞였고, 외지인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