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소노라 출발 164일만에 몬트레이 수비대에 도착하다-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1776년 3월 7일 목요일 (호르카… 출발 161일째)
이제 목적지 몬트레이 요새까지는 지척의 거리였다. 마침 5명의 탈주자를 체포하려 4주 전 수색대를 떠났던 모라가 중위가 3명의 병사와 함께 산 안토니오 선교원을 찾았다. 모라가의 수색대는 산타 오라야(Santa Olaya)와 콜로라도강 중간 지점에서 탈영자 5명을 전원 체포했다. 탈영자 5명은 산디에이고에 머무는 몬카다 총독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서둘러 디 안자 사령관과 탐험대를 뒤따랐다고 했다. 모라가 중위는 1월 이후 근 2달간 디 안자 사령관을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상면한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라가와 수색조는 탈영병들이 끌고 간 25마리의 말 중에서 14마리를 되찾았다. 탈영병들은 이 중 9마리는 달아나고 나머지 2마리는 원주민 공격으로 잃었다고 했다. 당시 탈영병들이 끌고 간 소떼는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 돌려보냈다. 모라가 일행이 산 가브리엘 선교원을 찾았을 때 마침 무장한 200여 원주민 전사와 대적했다. 이중에는 산디에이고 폭동에 가담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선교원에서 약탈한 제의 등 다수의 약탈품도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라가 중위와 수색대가 지나갈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는 모라가 수색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노련한 모라가 중위는 이들의 포위를 뚫고 무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탈영병 5명 체포하고 마소 다수를 확보
모라가 중위에 따르면 탈영병들의 탈영 동기는 꽤나 복합적이었다. 모라가 중위는 탈영병들을 심문한 결과, 통속소설처럼 남녀의 불륜도 탈영의 주요 동기였다고 했다. 장기간 일반 사회와 결별한 채 외롭게 지내다 보면 누구나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이때 쉽게 유혹하는 것이 뇌물과 배반이다. 디 안자의 탐험대가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서 장기간 머물 때 탐험대의 한 상병은 탐험대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외로운 상등병은 여인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노새몰이꾼을 유혹한 후 초콜릿 등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빼돌려 애인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당시 구하기 어려운 다량의 브랜디도 빼돌렸다. 이윽고 노새몰이꾼은 자신의 범행이 밝혀질 것이 두렵자 불만에 찬 병사 등을 유혹해 탈영할 동조자를 모집한 후 디 안자 사령관이 산디에이고에서 돌아오는 날, 탈영을 감행했다. 그러나 탈영의 동기를 제공했던 상등병은 탈영의 순간 결행을 포기했다.
3월 8일 금요일부터 3월 10일 일요일까지 (호르카…162일부터 164일까지)
날씨는 차지만 하늘은 맑았다. 일행은 산 안토니오를 떠나 북동쪽을 휘돌아 살리나스(Salinas) 계곡으로 빠져들었다. 이곳에서 몬트레이강을 따라 7시간 동안 21마일을 전진한 후 몬트레이강 근방, 오늘날 그린필드(Greenfield)라고 불리는 로스 오시토스 (Los Ositos: *작은 곰들)에서 야영했다. 밤새 내린 가랑비가 추위를 몰고 왔다. 아침나절은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에 전 대원은 몸을 떨었다.
일행은 다시 북서쪽을 향해 계곡을 휘돌아 포톨라(Portola) 총독이 솔다드(Soledad)라고 부른 곳을 지났다. 폰트 사제는 이날 몇몇 안토니오와는 외양이 다른 원주민들이 일행을 지나쳤다. 이들은 무척 영리해 보였고 몇몇은 스페인 카스티안 지방 말로 "몬카다 총독은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왔다라고 썼다.
산 가브리엘 출발 17일 만에 몬트레이에 도착
9일 토요일 일행은 30여 마일을 전진했다. 그리고 오늘의 곤잘레스(Gonzales) 서쪽 산타 루시아산 근방에 야영장을 차렸다. 이곳은 우리의 도착을 알리는 연락병을 후니페로 세라 신부에게 보낸 곳에서 오른편에 있었다. 폰트 신부는 연락병을 통해 후니페로 세라 신부에게 우리의 도착을 축하하는 미사를 들여줄 사제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한밤중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러나 10일 새벽녘 내리던 비는 오후 들어 잦아들었다. 일행은 강 줄기를 따라 북서쪽으로 전진한 후 다시 9마일가량 서·남서 쪽으로 전진한 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몬트레이 수비대에 드디어 도착했다. 산 가브리엘 선교원 출발 17일 만이다.
디 안자와 일행은 투박을 출발한 지 139일 만에, 그리고 호르카시타스를 출발한 지 164일 만이다. 투박에서 몬트레이까지 957마일 거리의 알타 캘리포니아에 정착 희망자를 이주시켰다. 디 안자와 그 일행이 도착하자 몬트레이 수비대 병사들은 하늘 높이 화승총과 작은 대포를 쏘아 일행을 환영했다.
몬트레이 수비대는 바다와 면하고 있었다. 수비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선착장이 있고, 우거진 소나무 숲 끝자락에 수비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네모형의 수비대는 사령관 숙소와 창고, 자그마한 성당, 병사들의 막사가 있었다. 병사들의 가족들 살림집도 두 개나 딸려 있었다. 수비대는 또한 나무 울타리와 흙벽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광장은 그리 넓지 않으나 방어용 울타리가 둘러막고 있어 몬트레이 수비대는 모든 것이 협소하여 병사나 가족 모두가 불편해한다고 폰트 사제는 생각했다.
디 안자 사령관의 숙소는 창고 옆에 있었다. 폰트 신부의 방도 협소하고 소독용 석회가 지저분하게 뿌려져 있었다. 디 안자의 병사들은 알맞은 장소를 찾아 야영장을 마련했다.
1776년 3월 11일 월요일 (호르카… 165일째)
미명에 카아멜 선교원을 출발한 후니페로 세라 신부와 4명의 사제는 아침 7시 몬트레이 수비대에 도착했다. 폰트 사제까지 모두 6명의 사제는 합동으로 무사 안착과 축하의 감사미사를 올렸다. 미사 후 4명의 사제는 카아멜 선교원으로 돌아갔다.
세라 신부는 장기간 여행에 지친 병사와 그 가족을 위문하려 몬트레이에 남았다. 세라 신부는 디 안자와 폰트 사제에게 당분간 카아멜 선교원에 머물면서 지친 몸을 편안히 다스리라고 권했다. 사령관과 종군 사제가 자리를 비우자 모라가 중위가 사령관을 대신해 병사와 대원들을 지휘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