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 언덕에 정착지를 마련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1776년 9월, 샌프란시스코 만 골든게이트 입구를 지나는 태평양 연안은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디 안자 사령관이 40여 명의 소규모 대원을 이끌고 출발지였던 소노라에 되돌아왔을 무렵, 그간 아무도 찾지 않던 샌프란시스코 만 입구 고지대에는 스페인 제국의 화려한 깃발이 거친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이로써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이 노리던 지상 최고의 낙원 알타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만에는 요새와 선교원, 그리고 소규모 정착촌이 들어서면서 알타 캘리포니아는 이제 명실공히 스페인 황제의 영토가 되었다. 디 안자 사령관은 정착 희망자 240명 (병사 36명과 그들의 부인과 어린이 포함)을 이끌고 2,000여 마일 밖 몬트레이에 도착한 후, 이어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를 탐험해 수비대와 선교원, 그리고 정착지가 들어설 자리를 선정했다. 그가 돌아간 후 몬트레이에 남아 있던 호아킨 모라가 중위는 새로 들어설 수비대의 병사와 그 가족들과 함께 수비대와 선교원, 그리고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로써 디 안자 2세는 아버지 디 안자 1세가 이루지 못했던 알타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만에 황제의 깃발이 태평양 바닷바람에 날리게 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이 탐내던 지상 최고의 낙원 알타 캘리포니아를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3세의 품에 안겼다.
뉴 스페인에서 1776년 6월경 보급선이 도착하자 투산으로 돌아가지 않은 모라가 중위는 현지에 남아 새로운 정착지 샌프란시스코 건설에 앞장섰다. 당시 36세이던 모라가 중위와 프란시스코 팔루(Palou) 신부는 1776년 6월경 정착 희망자들을 임시 거처였던 몬트레이에서 샌프란시스코 만 연안으로 이전시켰다. 이어 1776년 9월 14일, 금문만에서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수비대를 세웠다. 팔루 신부는 이보다 앞서 1776년 6월 29일 돌로레스 강 근방에서 정착촌 축하 미사와 선교원 기공식을 거행했고, 같은 해 10월 9일에는 세라 신부가 선교원 봉헌 미사를 집전했다. 이날 정착민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축하연이 열렸다. 당초 이 선교원은 ‘샌프란시스코 데 아시시 선교원(Mission San Francisco de Asisi)’으로 불렸으나, 돌로레스 강 근방에 있다 하여 돌로레스 선교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디 안자 사령관은 투산에 도착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동행했던 팔마 유마 부족 추장과 그의 동생, 두 명의 동행인, 그리고 스페인어를 배우러 떠나는 열 살의 파블로 등을 데리고 멕시코시티로 출발했다. 그는 부카렐리 총독에게 그간의 탐험 일지를 제출한 뒤 1777년 1월 투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뉴멕시코 총독에 임명되어 11년간 재직했다.
1776년 4월 9일 화요일부터 4월 12일까지 (호르…출발 194일부터 197일까지)
샌프란시스코 만(내포)을 방어할 요새와 이주민 정착촌, 선교원이 들어설 부지를 선정한 디 안자 사령관과 폰트 종군 사제는 몬트레이 수비대로 돌아온 직후 약 4.8마일 거리의 카르멜 선교원을 찾았다. 이는 디 안자 사령관의 사타구니 통증과 폰트 사제의 잇몸 통증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디 안자는 부축 없이는 말을 탈 수도, 내릴 수도 없었다.
양상추 같은 신선한 채소와 구운 생선은 두 사람에게 효험이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폰트 사제는 그간 탐험한 샌프란시스코 내포의 지도를 작성해 디 안자 사령관과 세라 관구장에게 한 부씩 전달했다. 다음 날 디 안자 사령관은 해변으로 몰려와 은빛 비늘을 번쩍이는 정어리 떼의 장관을 보며 아픈 몸을 달랬다. 그러나 폰트 사제는 타들어 가는 잇몸 통증으로 계속 자리를 지켰다.
디 안자가 약 20여 일 전 산디에이고 수비대에 머물던 리베라 몬카다 알타 캘리포니아 지사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리베라 지사는 아무런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알타 캘리포니아에 선교원을 세우는 일조차 지사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베라는 디 안자의 요새·선교원·정착지 위치 선정을 논의하자는 제안에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오는 4월 12일 아리조나 소노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디 안자 사령관은, 4월 25일 또는 26일 중 하루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서 만나 정착 희망자들의 샌프란시스코 이주 문제를 협의하자는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병사 5명을 리베라에게 보냈다. 그러나 끝내 답신은 없었다.
4월 13일 토요일부터 4월 14일 일요일까지(호르…출발 198일부터 199일까지)
나흘간 요양하며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을 추스른 디 안자와 폰트 사제는 몬트레이 수비대로 돌아와 정착촌과 요새, 선교원 건설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동안 몬트레이 수비대에 머물던 190명의 이주 희망자는 모라가 중위가 돌보았다. 폰트 사제는 병사와 여인들, 어린이 등 190명의 세세한 인적 사항을 정리했다.
디 안자 사령관, 26명을 이끌고 소노라로 출발
디 안자와 함께 소노라로 출발할 병사, 노새몰이꾼, 시종 등 모두 27명이 출발을 준비했다. 부식을 실은 노새 무리가 뒤따랐다. 출발 당일 마음을 바꾼 여인 한 명이 정착을 포기하고 소노라로 돌아가겠다고 나서면서, 돌아갈 인원은 모두 26명이 되었다. 디 안자 일행이 출발한 14일, 몬트레이 해변의 날씨는 쾌청했다.
디 안자와 폰트 사제를 전송하기 위해 세라 신부와 산 안토니오 선교원의 프리에라스(Prieras) 사제가 몬트레이 수비대를 찾았다. 오후 2시, 디 안자 사령관의 우렁찬 ‘출발’ 구령에 따라 단출한 일행 26명은 살리나스 계곡을 향해 떠났다. 모라가 중위는 일행이 야영할 부에나 비스타(Buena Vista)까지 동행했다.
4월 15일 월요일 (호르…출발 200일째)
15일 새벽 6시 30분, 모라가 중위는 몬트레이 수비대를 향해 서쪽으로 말을 몰았고, 디 안자는 강줄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향했다. 4월이었지만 해변의 공기는 쌀쌀했다. 채 6마일도 가지 못해, 앞서 디 안자가 리베라 지사에게 보냈던 병사 5명을 만났다. 이들은 산 안토니오 선교원에서 리베라 지사를 만나 디 안자의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편지를 전달한 곤고라(G?ngora) 상사는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디 안자에게 독대를 청했다. 그는 한마디로 “리베라 지사는 미쳐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디 안자 사령관의 편지를 건네자, 리베라는 편지를 보지도 않고 짐 속에 쑤셔 넣으며 “정착촌 건설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 리베라 지사는 선교원으로 몸을 피해 온 원주민들을 강제로 몰아내는가 하면, 대화보다는 징벌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 원주민들을 자극해 왔다. 또한 화해를 주장하던 원주민 주모자 중 한 명인 카를로스를 강제로 체포해 선교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는 말도 전해졌다. 동행했던 병사들 역시 같은 증언을 했다.
디 안자는 곤고라 상사 일행과 헤어진 뒤 약 3마일가량 전진해 몬트레이 수비대로 돌아가던 리베라 지사 일행과 마주쳤다. 리베라 지사는 수염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채 초췌한 모습이었고, 쌀쌀한 날씨 탓인지 담요를 온몸에 두른 채 모자가 왼쪽 눈까지 내려와 있었다.
리베라와 마주친 디 안자 사령관은 일상적인 안부만 건넨 뒤, 정착촌 건설에 대한 리베라 지사의 태도에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리베라는 노새에 채찍을 가한 채 아무 말 없이 지나치려 했다. 이에 디 안자는 “당신의 알타 캘리포니아 통치권이 어떻게 변할지 지켜보겠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리베라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지나쳤다. 더 이상의 인사는 없었다.
그날 오후 리베라는 몬트레이 수비대에 도착했고, 디 안자는 48마일을 달려 저녁 무렵 산 버나비에서 야영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