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 언덕에 정착지를 마련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5월 13일 월요일부터 5월 15일 수요일까지 (호르…출발 228부터 230일까지)
일행은 무사히 도강한 후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이때 디 안자는 어떤 스페인인이 반대편 제방에 도착했다는 원주민의 말을 들었다. 15일 수요일 오후, 유마인들이 그를 디 안자에게 데려왔다.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탈영했던 노새몰이꾼이었다. 그는 모라가의 손길을 피했으나 이곳에서 디 안자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다시 노새몰이가 되었다.
오후 5시, 일행은 멕시코로 떠나는 팔마 추장을 환송하기 위해 모여든 유마인들과 헤어졌다. 일행은 추가로 합류한 유마인과 아이하르츠 신부, 두 명의 사환, 두 명의 통역, 그리고 탈영범 출신 노새몰이꾼까지 더해져 무려 4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행은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힐라강을 따라 동쪽으로 말을 몰았다. 디 안자와 몇몇 병사들이 일행을 인도했다.
5월 16일 목요일부터 5월 18일 토요일까지(호르…출발 231일부터 233일까지)
16일 미명, 폰트 사제는 앞서 출발한 디 안자 사령관의 행방을 찾기 위해 병사 두 사람을 내보냈다. 디 안자를 찾아 나선 병사들은 아침 6시 15분경 돌아왔다. 다시 만난 폰트와 디 안자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6마일을 전진해 도도히 흐르는 힐라강변에서 정지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임시 쉼터를 만든 뒤, 짐을 싣고 천천히 오는 노새 무리를 기다렸다.
칼을 훔쳐 땅에 숨겼던 원주민, 매질에 혼절
일부 유마인들은 도보로 일행을 뒤따랐다. 디 안자와 폰트 사제는 팔마 추장을 전송하는 유마인들에게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권했으나, 그들은 끈질기게 뒤따랐다. 디 안자와 폰트 사제의 설득에 결국 코하트 원주민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유마인들은 집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뒤따르던 코하트 원주민도 다음 날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오후 들어 출발을 준비할 때, 노새 무리를 지휘하던 우두머리가 아끼던 긴 칼을 잃었다고 호소했다. 일행은 무리 중에서 평소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던 코하트 부족 출신 한 명을 팔마 추장 앞에 세웠다. 그는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다음 날 출발하겠다고 약속한 원주민이었다. 팔마 추장의 형제 중 한 명이 이를 수상히 여겨 추궁했다. 강력히 부인하던 범인은 결국 긴 칼을 땅속 깊이 숨겼다고 실토했다.
폰트 사제는 채찍을 팔마 추장에게 건네 매질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 번째 매질에 범인은 피를 흘리며 거의 혼절했다. 폰트 사제는 자칫 범인이 사망할까 두려워 매질을 중단시켰다.
오후 4시, 일행은 다시 출발해 9마일을 달린 후 힐라강과 그리 멀지 않은 라구나 살로브레(Laguna Salobre)에 야영지를 마련했다. 날씨가 너무 후덥지근하고 더워 사람과 가축 모두 전신이 마비될 정도였다.
오후 중반, 일행은 라구나 살로브레를 출발해 강줄기를 끼고 남동쪽으로 향했다. 디 안자와 일행은 이날 ‘악마의 길’의 멕시코 측 종착역인 카보르카(Caborca)에서 산 미겔 데 오르카시타스(San Miguel de Horcasitas) 노선을 택했다. 이 노선은 실제 힐라강을 따라 투박(Tubac)에 이르는 길보다 짧았다. 엄청난 더위로 가축 세 마리가 죽었다.
야영지를 마련한 뒤 휴식을 취하고, 토요일 새벽 4시 더위가 오기 전 다시 말을 달렸다. 그리고 티나하스 데 라 칸델라리아(Tinajas de la Candelaria)에서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휴식을 취하며 더위를 피했다. 이후 다시 말을 달려 새벽 4시 45분, 란스 델 투살(Llanos del Tuzal)에 이르기까지 42마일을 달렸다.
5월 19일 일요일부터 5월 24일 금요일까지(호르…출발 234일부터 239일까지)
노새 무리는 다음 날 새벽 4시경 도착했다. 다시 출발한 일행은 아침 식사 후 투살에서 지친 말을 갈아탄 뒤 오전 5시경 출발했다. 오전 11시 30분경 엘 카리살 델 소노이타(El Carizal del Sonoita)에 도착해 물과 음식을 취한 뒤 다시 말을 달렸다. 강행군 탓에 말 세 마리와 노새 한 마리가 탈진으로 죽었다.
사막의 한낮은 숨쉬기조차 뜨거웠으나 밤은 담요를 둘러야 할 만큼 추웠다. 새벽 5시 15분, 일행은 내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이제는 폐허가 된 산 마르셀 데 소노이탁(San Marcelo de Sonoitac)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20여 가구의 파파고 원주민들이 물이 흐르는 냇가를 끼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불행히도 이 마을에는 불을 땔 화목이 부족했으나, 다행히 근처 냇가에 버드나무 숲이 있었다.
6시경 일행은 휴식을 취한 뒤 이 마을을 떠나, 오래전 예수회 사제를 살해한 곳에 세워진 십자가 앞을 지나 목초가 넉넉한 둔덕에서 야영했다. 21일 화요일, 일행은 해 뜨기 전 출발해 더워지기 전까지 42마일을 달려 산 후안 데 라 마타(San Juan de la Mata)에 도착해 야영지를 마련했다.
‘악마의 길’을 50마일씩 네 차례나 오간 디 안자
카보르카를 지나 힐라강과 콜로라도강이 합류하는 지점은 누구도 엘 카미노를 통해 지난 적이 없었다. 이 길은 1760년 초 키노 예수회 신부와 스페인 탐험가가 개척했다. 이후 250마일에 이르는 이 길은 속칭 ‘악마의 길(El Camino del Diablo)’이라 불렸다. (*지금도 길 양편에는 기아와 탈진, 탈수로 사망한 50여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유마의 팔마 추장은 1773년 산 가브리엘 선교원의 탈영자 타라발(Tarabal)을 ‘악마의 길’을 통해 스페인 소노라의 요새로 인도했다. 그는 디 안자의 제1차 알타 캘리포니아 탐험 때 길 안내를 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1774년과 1775년 두 차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정착민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난 뒤 다시 소노라로 돌아갈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아이하르츠 신부 역시 알타 밸리 방문 때 ‘악마의 길’을 지났다.
5월 22일 수요일 새벽 5시 30분, 일행은 산 후안 데 라 마타를 출발해 오전 11시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에 도착했다. 인근 마을에서 낮잠을 자며 뜨거운 한낮을 피한 뒤 한밤중에 길을 나섰다. 목요일인 23일, 아리바피에서 카보르카까지 18마일을 정오 전에 도착했다.
그동안 지친 말을 갈아타기 위해 카보르카 수비대에 튼튼한 말을 준비해 달라고 병사 네 명을 먼저 보냈다. 그러나 벨데레인(Felipe Velderrain) 중위가 몇몇 병사와 함께 투박에서 건강한 말 12마리를 몰고 일행을 찾아왔다. 벨데레인 중위는 투마카코리 선교원에 아파치 무리가 분탕질을 쳤다고 전했다. 아파치들의 공격은 주변 마을로까지 번지며 계속되었고, 아파치와 파파고 원주민 연합 전사들이 디 안자 일행이 지나갈 씨네길라(Cineguilla) 마을까지 공격했다고 전했다.
5월 25일 토요일부터 5월 28일 화요일까지(호르…출발 240일부터 243일까지)
투박에서 건강한 말 12마리를 끌고 병사들과 함께 카보르카를 찾았던 벨데레인 중위는 25일 토요일, 그가 선교하던 투마카코리 선교원으로 돌아가는 아이하르츠 신부와 함께 떠났다.
이날 오후 디 안자와 그의 일행은 당초 샌프란시스코만 정착민을 모집했던 오르카시타스로 들어서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석양 무렵 더위는 견딜 만했다. 일행은 평평한 길 24마일을 가기 전, 몇 시간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밤중까지 머물렀다.
비교적 쾌적한 날씨 속에 일행은 5시간을 달려 아침 9시경 광산촌 씨네길라(Cineguilla)에 도착했다. 씨네길라의 왕실 야영본부는 광산촌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 디 안자는 이곳에서 매주 70~75 황금 마르크를 생산한다고 했다.
이 금광에는 광부들을 비롯해 요새의 병사, 상인, 사제, 정착민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이 금광의 노동력은 대부분 원주민의 몫이었다.
5월 27일, 디 안자 사령관은 말을 탄 아파치 무리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전언에 따라 이곳에 하루 더 머물기로 하고 병사 10명을 보내 주변 3마일을 정찰하게 했다. 그러나 아파치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