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 언덕에 정착지를 마련하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5월 19일 일요일부터 5월 24일 금요일까지(호르… 출발 234일부터 239일까지)
노새 무리는 다음 날 새벽 4시경 도착했다. 다시 출발한 일행은 아침 식사 후 투박에서 지친 말을 갈아탄 뒤 오전 5시경 출발했다. 오전 11시 30분경 엘 카리살 델 소노이타(El Carizal del Sonoita)에 도착해 물과 음식을 취한 뒤 다시 말을 달렸다. 강행군 탓에 말 세 마리와 노새 한 마리가 탈진으로 죽었다.
사막의 한낮은 숨 쉬기조차 뜨거웠으나 밤은 담요를 둘러야 할 만큼 추웠다. 새벽 5시 15분, 일행은 내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이제는 폐허가 된 산 마르셀 데 소노이탁(San Marcelo de Sonoitac)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20여 가구의 파파고 원주민들이 물이 흐르는 냇가를 끼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불행히도 이 마을에는 불을 땔 화목이 부족했으나, 다행히 근처 냇가에 버드나무 숲이 있었다.
6시경 일행은 휴식을 취한 뒤 이 마을을 떠나, 오래전 예수회 사제를 살해한 곳에 세워진 십자가 앞을 지나 목초가 넉넉한 둔덕에서 야영했다.
21일 화요일, 일행은 해 뜨기 전 출발해 더워지기 전까지 42마일을 달려 산 후안 데 라 마타(San Juan de la Mata)에 도착해 야영지를 마련했다.
‘악마의 길’을 50마일씩 네 차례나 오간 디 안자카보르카를 지나 힐라강과 콜로라도강이 합류하는 지점은 누구도 엘 카미노를 통해 지난 적이 없었다. 이 길은 1760년 초 키노 예수회 신부와 스페인 탐험가가 개척했다. 이후 250마일에 이르는 이 길은 속칭 ‘악마의 길(El Camino del Diablo)’이라 불렸다. (*지금도 길 양편에는 기아와 탈진, 탈수로 사망한 50여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유마의 팔마 추장은 1773년 산 가브리엘 선교원의 탈영자 타라발(Tarabal)을 ‘악마의 길’을 통해 스페인 소노라의 요새로 인도했다. 그는 디 안자의 제1차 알타 캘리포니아 탐험 때 길 안내를 했다. 디 안자 사령관은 1774년과 1775년 두 차례,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정착민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난 뒤 다시 소노라로 돌아갈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아이하르츠 신부 역시 알타 밸리 방문 때 ‘악마의 길’을 지났다.
5월 22일 수요일 새벽 5시 30분, 일행은 산 후안 데 라 마타를 출발해 오전 11시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에 도착했다. 인근 마을에서 낮잠을 자며 뜨거운 한낮을 피한 뒤 한밤중에 길을 나섰다.
목요일인 23일, 아리바피에서 카보르카까지 18마일을 정오 전에 도착했다. 그동안 지친 말을 갈아타기 위해 카보르카 수비대에 튼튼한 말을 준비해 달라고 병사 네 명을 먼저 보냈다. 그러나 벨데레인(Felipe Velderrain) 중위가 몇몇 병사와 함께 투박에서 건강한 말 12마리를 몰고 일행을 찾아왔다. 벨데레인 중위는 투마카코리 선교원에 아파치 무리가 분탕질을 쳤다고 전했다. 아파치들의 공격은 주변 마을로까지 번지며 계속되었고, 아파치와 파파고 원주민 연합 전사들이 디 안자 일행이 지나갈 씨네길라(Cineguilla) 마을까지 공격했다고 전했다.
5월 25일 토요일부터 5월 28일 화요일까지(호르… 출발 240일부터 243일까지)
투박에서 건강한 말 12마리를 끌고 병사들과 함께 카보르카를 찾았던 벨데레인 중위는 25일 토요일, 그가 선교하던 투마카코리 선교원으로 돌아가는 아이하르츠 신부와 함께 떠났다.
이날 오후 디 안자와 그의 일행은 당초 샌프란시스코만 정착민을 모집했던 오르카시타스로 들어서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석양 무렵 더위는 견딜 만했다. 일행은 평평한 길 24마일을 가기 전, 몇 시간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밤중까지 머물렀다.
비교적 쾌적한 날씨 속에 일행은 5시간을 달려 아침 9시경 광산촌 씨네길라(Cineguilla)에 도착했다. 씨네길라의 왕실 야영 본부는 광산촌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 디 안자는 이곳에서 매주 70~75 황금 마르크를 생산한다고 했다.
이 금광에는 광부들을 비롯해 요새의 병사, 상인, 사제, 정착민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이 금광의 노동력은 대부분 원주민의 몫이었다.
5월 27일, 디 안자 사령관은 말을 탄 아파치 무리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전언에 따라 이곳에 하루 더 머물기로 하고 병사 10명을 보내 주변 3마일을 정찰하게 했다. 그러나 아파치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5월 29일 수요일부터 6월 1일 토요일까지(호르… 244일부터 247일까지)
일행은 29일 오후 늦으막하게 출발했다. 일행은 21마일을 전진한 후 한밤중 세로 프리토(Cerro Prieto)에 도착해 새벽 5시경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늦은 아침, 아마도 적들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토레토(Tecolote) 연못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오후 2시까지 가축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 후, 적들의 공격을 피해 일행은 한밤에도 쉬지 않고 달렸다.
한낮의 열기가 아직도 먼 곳에서 느껴지는 한밤, 적들이 숨어 있더라도 눈에 띄지 않을 위험한 어둠이었다. 주변에 방어막을 치고 일행은 라 토르투가(La Tortuga) 근처에 야영장을 차렸다. 다음 날 새벽 5시, 일행은 야영장을 정리한 후 오후 3시까지 말을 달렸다. 일행이 라 메사(La Mesa)에 야영장을 차렸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후미를 지키던 병사가 다수의 적들이 말을 타고 우리가 지나온 길을 거슬러 지나갔으나 어느새 이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밤새 일행은 주위 감시를 철저히 했다. 한 보초병이 말을 타고 달리는 아파치를 보았다고 했으나, 아파치가 탄 말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디 안자에게 보고했다.날이 밝자마자 디 안자 사령관은 병사 4명을 지휘해 근방을 집중 수색했다. 그러나 디 안자와 병사들은 30여 명의 아파치 잔당들이 일행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음을 알았다. 6마일을 달려 디 안자와 4명의 정찰병은 먼저 출발한 일행과 합류한 후 산 미구엘 데 오르카시타스(San Miguel de Horcasitas) 수비대로 들어섰다. 마침 부카렐리(Bucareli) 총독이 뉴멕시코를 방문하라는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