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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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에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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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산 사령관직 사임 후 새 보직을 기다려
연속된 장거리 탐험으로 디 안자 사령관의 심신은 피폐했다.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도, 입양한 귀여운 아들과 딸의 재롱도 옛이야기처럼 생소했다. 그의 탈진은 드디어 사타구니 통증과 만성 열병으로 나타났다. 1776년 6월 1일, 출발지였던 소노라의 호르카시타스에 도착했을 무렵 뉴 스페인 총독 부카레리(Antonio Maria Bucareli) 총독의 직접 보고하라는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디 안자 사령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심신을 달래주는 휴식이었다.
1774년 1월 8일부터 1774년 5월 26일까지 몬트레이 만을 탐험하고 투박으로 돌아오기까지 150일은 긴장과 극심한 체력 소모의 기간이었다. 제대로 휴식할 틈도 없이 디 안자 사령관은 부카레리 총독을 방문하고, 이어 정착민을 인도하는 제2차 탐험을 준비했다.
1775년 9월 29일, 이주 희망자 240명과 보조요원이 포함된 300여 명과 1천여 마리의 가축을 몰고 근 1천여 마일을 달려 1776년 3월 10일 몬트레이 수비대에 도착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SF만 일대에 알맞은 정착지를 살핀 후, 1776년 3월 13일 몬트레이 수비대를 출발하여 다시 출발지였던 소노라의 호르카시타스에 1776년 6월 1일 도착했다. 모두 180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다시 근 1천여 마일의 멕시코시티까지 말을 달려야 하다니, 그의 체력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당시 디 안자 사령관에게는 뉴멕시코주의 총독 자리가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디 안자는 부카레리 총독과 어느 정도 숙의를 거친 후 대면 보고 일정을 추후로 잡았다. 디 안자 사령관은 정착지와 수비대, 그리고 선교원 부지 선정 과정을 서면으로 연락병 편에 총독에게 보고하고, 일단 호르카시타스까지 마중 온 아내 마리아(Ana Maria Perez de Sorrano)와 어린 입양 아들과 딸과 반갑게 재회한 뒤 잠시 아리즈페 자택에 머물었다.
디 안자는 탐험 기간 내내 몸이 성치 못했다. 특히 디 안자는 몬트레이 수비대에 도착하자 카아멜 선교원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했다. 휴식 후 다시 SF만으로 정착지 선정에 나섰을 때는 스스로 말을 타거나 내릴 수도 없었다. 언제고 병사나 시종이 도와주어야 했다. 그에게는 또한 만성적인 열병이 따랐다. 디 안자는 투산으로 귀대하는 13명의 병사를 일단 투산 수비대로 복귀시켰다.

팔마 추장의 총독 예방을 주선하다
이후 호르카시타스에 머물면서 디 안자는, 디 안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마중 나온 부인 마리아(Ana Maria Perz de Serrano)와 입양한 아들과 딸과 함께 호르카시타스에 머물며 6월과 7월을 보냈다. 이 기간 그는 탐험 과정과 경비 보고서 작성, 그리고 탐험 지역 지도를 정리하고 원주민과의 관계도 세세히 정리했다. 그리고 7월 말경 신병과 장기간 출장 등의 이유로 투산 수비대 사령관직을 사임했다.
디 안자가 콜로라도강을 건널 때 멕시코시티 방문을 정식 요청한 팔마 추장은 디 안자와 함께 호르카시타스에 머물렀다. 이때 디 안자 사령관은 유마 부족 팔마 추장의 멕시코시티 방문과 영세 및 부카레리 총독의 면담을 주선했다. 그간 호르카시타스에 머물던 디 안자 사령관은 소노라 지사와 지역 사령관에게 탐험 전 과정을 세세히 보고했다.
이어 멕시코 방문 후 디 안자가 아리즈페 본가로 돌아갈 때 팔마 추장 일행도 동행하기로 하고, 그간의 경호 및 체류와 여행 중 숙식 문제 등을 총독 측과 조율했다. 이러한 제반 문제가 해결되고 디 안자의 뉴멕시코 총독 임명 절차가 스페인 본국에서 매듭되는 시점을 감안하여 디 안자와 팔마 추장 일행은 1776년 9월 말 호르카시타스에서 무려 1,200마일 거리의 멕시코시티를 향해 출발했다.
디 안자는 팔마 추장의 동생 파드레와 이들을 경호하고 시중드는 원주민 전사 2명, 스페인어를 정식으로 공부시키려 산루이스 선교원이 추천한 어린 소년과 함께 10월 중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일행은 총독이 마련한 숙소에 머물렀다. (* 일부 사료에는 디 안자가 부인과 자녀도 여행에 동행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팔마 추장, 영세를 받다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디 안자 사령관은 우선 1월 중 부카렐리 총독에게 탐험 경위와 정착지 선정 과정을 보고했다. 부카렐리 총독은 디 안자가 손수 수비대와 선교원 등 정착지를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멕시코시티에 머무는 동안 팔마 추장은 동생과 함께 발달된 유럽의 농법과 관개 수로, 농기구 사용법을 직접 살폈다.
그리고 1777년 2월 13일, 멕시코 대성당에서 동생 파드레와 함께 살바도르 카를로스 안토니오(Salvador Carlos Antonio)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팔마 추장은 또한 부카레리 총독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총독에게 깃털로 만든 아름다운 머리장식과 수공예품을 선물했고, 총독은 팔마 추장에게 스페인 군인 복장을 선물했다.
그리고 팔마 추장의 요청대로 추장의 고향 콘셉션 마을과 인근 산 세바스쳔 마을에 선교원을 세워주기로 했다. 그러나 콜로라도강 유역에 수비대를 세워 달라는 팔마 추장의 요청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2개의 선교원은 유마인 폭동이 있기 1년 전인 1780년, 순차적으로 개원했다.
한편, 디 안자는 부카레리 총독에게 탐험 과정과 정착지 선정을 대면 보고하고, 탐험 일지와 폰트 사제가 작성한 SF만 일대의 지도도 제출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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