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에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41살에 뉴멕시코 총독에 오르다
디 안자의 뉴멕시코 총독 임명식은 1777년 3월 24일, 멕시코 총독 관저에서 거행되었다. 부카레리 총독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임명장을 디 안자 2세에게 직접 수여했다. 이로써 뉴멕시코 총독이 된 디 안자는 총독의 격에 따른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1777년 3월 말경 가족이 기다리는 아리조나 아리즈페로 향했다.
신임 총독 디 안자의 경호를 위해 뉴멕시코에서는 이때 영세를 받은 살바도르 팔마 추장과 그의 동생 파드레, 그리고 시종 겸 경호원이 동행했다. 디 안자는 아리즈페에 도착한 뒤 팔마 추장 일행과 헤어졌으며, 팔마 추장 일행은 디 안자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콜로라도 컨셉션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디 안자는 1777년 4월 18일, 애리조나 아리즈페에서 약 500마일 떨어진 산타페에 도착했고, 이튿날인 4월 19일 축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공식 취임식을 가졌다. 그의 취임식에 가족이 함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취임식 전후 그의 일기에는 강을 건널 때 여인이나 어린이가 타는 말이 함께 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있어, 혹시 그의 부인이나 입양한 자녀가 동행했을 가능성을 추측할 뿐이다.
디 안자가 취임할 당시 뉴멕시코의 주민 수는 2천에서 3천 명 정도였다. 스페인 정착민은 병사나 행정 관료 등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스페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나 원주민이었다. 이들은 갈대를 엮은 초막이나 흙벽돌 아도비 집에서 농사와 목축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만약 디 안자 가족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당시 뉴멕시코는 코만치족이 활개 치는 치안 불안 지역이었기에 디 안자 스스로 동행을 주저했거나, 혹은 그의 부인 마리아가 뉴멕시코행을 거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코만치 추장 부자 사살 후 평화 협정 마련
디 안자는 1778년부터 1788년까지 10년간 뉴멕시코 총독직을 수행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뉴멕시코 일대에서 발호하던 코만치족을 진압하며 지역에 평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1779년 9월 9일, 디 안자 총독은 병력을 이끌고 콜로라도 남부 그린홀에서 코만치족과 일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악명을 떨치던 ‘녹색 뿔’이라는 별명의 쿠에르네 베르데(Cuerne Verde) 추장 부자와 다수의 용맹한 코만치 전사를 소탕했다. 이 패배 이후 코만치족은 1786년 디 안자의 평화 협정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는 약 200년간 뉴멕시코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만치 세력을 제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디 안자 총독은 이후 건강 악화로 1788년 말 총독직을 사임하고 고향 아리조나 아리즈페로 돌아가 요양하던 중, 같은 해 12월 19일 그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만성 고열로 사망했다. 1736년 7월 7일 소노라 프론테라스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그는, 과로로 인한 열병으로 5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자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최변방 수비대 영내에서 태어나고 자란 디 안자는 이주민의 안전한 삶이 전적으로 원주민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는 항상 원주민을 진심으로 대했으며, 전투와 정복보다는 공존을 추구했다. 두 차례에 걸친 알타 캘리포니아 원정에서도 그는 힐라강과 콜로라도강을 유마족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건널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디 안자의 위대한 탐험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살바도르로 영세를 받은 팔마 추장
팔마 추장은 매우 영리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농업 기술과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이에 팔마 추장은 유럽인의 종교를 직접 받아들이고, 이를 동족에게도 권했다.
멕시코시티에 머무는 동안 팔마 추장은 동생 파드레와 함께 서구식 농법을 직접 체험하고, 농기구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폈다. 그러나 1781년, 콜로라도 인근 일부 유마인들이 스페인 정착민 약 100명과 모하비 사막을 최초로 횡단하며 콜로라도강변 원주민 선교에 헌신하던 가르세 신부를 살해하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자 그의 지도력은 급격히 흔들렸다.
이 폭동으로 콜로라도강 일대에 거주하던 100여 명의 스페인 정착민과 가르세 신부가 목숨을 잃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정착촌 건설에 제동을 걸던 리베라 몬카다 전 알타 캘리포니아 지사 또한 살해당했다. 이 사태로 크게 낙심한 팔마 추장은 결국 스스로 자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