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ZT 어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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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에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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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10일 만에 ‘슬픔의 냇가’에 정착
한편 샌프란시스코 만에 세울 수비대 병력과 그 가족, 일부 정착민의 이주 계획도 문서로 정리되었다. 디 안자와 동행할 유마족 팔마 추장의 호르카시타스에 머무는 동안인 6월 17일, 호아킨 모라가 중위는 1차로 약 45명의 샌프란시스코 만 정착 희망 수비대 병사와 그 가족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들은 정착에 필요한 각종 농기구와 파종용 씨앗을 실은 약 20마리의 나귀와 노새, 말 70마리, 소 200마리, 그리고 다수의 양과 염소를 몰고 몬트레이 만을 떠났다. (몰고 간 가축의 숫자는 사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모라가 중위는 몬트레이 수비대에서 118마일 떨어진 ‘약초의 땅'(Yerba Buena)인 샌프란시스코 만 남쪽 해안의 냇물이 흐르는 습지대에 약 10일 만인 6월 27일 도착했다. 이곳은 디 안자 사령관과 폰트 사제가 3개월 전인 3월 27일 정착지로 점지한 장소였다.
이날 도착한 정착민은 모라가 중위를 비롯해 프란시스코 파로우(Francisco Palou, 1723년 1월 22일 스페인 마요르카 출생~1789년 멕시코시티 사망) 신부와 페드로 베니또 캄본(Pedro Benito Cambon, 1738년 스페인 갈리시아 출생~1792년까지 생존, 사망일 미상) 신부, 병사 14명, 하사관 2명, 일부 목수와 목동 등 일반인 7명, 노새몰이꾼 5명의 원주민, 부녀자와 어린이 20명 등 모두 45여 명이었다. (*일부 사료에는 6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출발 10일 만에 지금의 미션 디스트릭트에 해당하는 라구나 데 로스 돌로레스(Laguna de los Dolores)에 짐을 풀었다. 정착민 대부분은 병사와 그 가족이었으며, 노새몰이꾼과 짐꾼, 가축몰이꾼과 시종 등도 함께 정착했다.
이날 정착한 병사와 일반인은 다음과 같다. 로사리오(Rosario)와 그의 부인 마리아 델 로사리오(Maria del Rosario), 후안 호세 데 발렌수엘라(Juan Joseph de Valenzuela)와 그의 아내 호세파(Josefa de Valenzuela)와 자녀들, 도밍고 베르날(Domingo Bernal)과 가족들, 마누엘 버튼(Manuel Burton)과 아내 마가리타(Margarita)와 자녀들, 호아킨 이시드로 데 카스트로(Joaquin Isidro de Castro)와 아내 마리아 안토니아 아마도르(Maria Antonia Amador)와 자녀들, 미혼이었던 루이스 페랄타(Lluis Peralta), 호세 안토니오 산체스(Jose Antonio Sanches), 호세 마리아 아마도르(Jose Maria Amador), 이그나시오 소토(Ignacio Soto) 등이었다.
또한 아르바요(Maria Feliciana Arballo)처럼 과부가 된 여성도 있었다. 아르바요는 멕시코와 흑인 혈통의 혼혈로, 부녀 대원들을 결속하고 조직적으로 운용하여 탐험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사막을 지날 때 자진하여 노래와 춤으로 지친 대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후 오클랜드, 버클리, 산타크루즈, 산호세 등지로 흩어져 목축과 농경으로 크게 번성했다.

오흐로네 원주민 본거지에 정착
정착민들이 짐을 푼 돌로레스 강가의 습지대는 예부터 비옥한 땅으로, 라벤더 등 향기로운 약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곳이었다. 디 안자와 폰트 사제가 20여 명의 대원과 함께 늪과 연못이 있는 냇가를 처음 찾은 날은 1776년 3월 27일이었다. (*일부 사료에는 1776년 4월 5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부활절을 앞둔 ‘고통의 수난 주일’이었다.
물이 넉넉히 흐르는 냇가에 도착했을 때는, 아들 예수를 잃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기리는 수난주간이었다. 디 안자와 폰트 사제는 이 냇물을 돌로레스(Rio de Dolores), 즉 ‘슬픔의 강’이라 불렀다.
이곳은 현재 돌로레스 선교원 공원 남동쪽, 북위 37도 76분, 서경 122도 42분 지점에 해당한다. 늪지대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초지가 완만하여 가축 방목이 쉬웠으며 식수 조달도 용이했다. 또한 수비대가 들어설 후보지와는 약 5km 떨어져 있어, 스페인의 군과 선교원을 분리한다는 원칙에도 부합했다.
모라가 중위는 정착민들이 우선 이슬을 가릴 움막을 세우도록 지시하고, 화목과 식수를 확보하게 했다. 몰고 온 가축을 초지에 풀어놓은 뒤, 모라가는 파로우 신부와 함께 선교원과 수비대가 들어설 후보지를 정하기 위해 인근 해안가로 말을 몰았다.

오흐로네 부족과의 조우
모라가 중위가 이끄는 정착민이 들어선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는 코스타노스(Costanos, 스페인어로 ‘해안가 사람들’)라 불린 오흐로네(Ohlone)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버클리, 오클랜드, 산타크루즈 등지에 50여 개의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오늘날의 산마테오, 데일리시티를 포함한 ‘좋은 약초의 땅’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에서 수천 년 전부터 살아온 이들은 바다에서 물고기와 물개를 잡고, 육지에서는 도토리와 나무 열매, 풀뿌리 등을 채취하며 생활했다.
특히 정착민이 자리 잡은 돌로레스 습지대 주변에는 약 1만 5천여 명의 오흐로네 부족이 모여 살고 있었다. 기후가 쾌적했던 덕분인지 이들은 외지인에게 큰 적의를 보이지 않는 온순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다만 처음 보는 외지인들을 몸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었다.

선교원은 영세받은 원주민만 거주
스페인 당국이 알타 캘리포니아, 특히 샌프란시스코 만 일대에 집착한 이유는 영토 확보와 함께 토착민을 전교하여 스페인 왕실의 신민으로 삼으려는 데 있었다. 토착민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면 왕의 보호를 받는 대신 절대적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이유로 선교원은 왕의 절대적 지원을 받았다. 선교원에는 일반인이 거주할 수 없었으며, 오직 영세를 받은 토착민만이 도움을 받으며 거주할 수 있었다.
모라가 중위와 파로우 신부는 선교원이 들어설 자리를 돌로레스 냇가 인근으로 확정했다. 또한 그곳에서 약 5km 떨어진 지점에 수비대와 그 주변 1에이커를 일반 정착민의 정착지로 정했다. 파로우 신부는 돌로레스 냇가 주변 3~4에이커에 선교원을 세우기로 했다. 오늘날의 차이나타운과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캠프 거리(Camp St.)와 알비온 거리(Albion St.) 교차점 일대이다.
선교원은 이곳에 농경지와 방목장을 마련했다. 한때 선교원의 농경지와 목초지는 남쪽으로 산마테오, 동쪽으로 알라메다까지 이어지는 1,051에이커에 달했다. 이곳에서 소 1만 1천 마리, 양과 염소 1만 1천 마리를 사육했다. 선교원 측은 가축 우리를 세우고, 돌로레스 냇가에는 우유를 짜는 막사를 두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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