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에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2일 후 6월 29일, SF만 최초 미사 올리다
수비대와 선교원 부지가 확정되자 파로우 사제와 모라가 중위는 도착 2일 후인 6월 29일, SF만 ‘슬픔의 냇가’ 근방에서 처음으로 파로우와 캄본 두 신부의 공동 집전으로 감사 미사를 올렸다. 이날은 마침 성 요한 축일이었다. 미사에는 정착한 병사와 그들의 부인, 자녀 등 15~45명이 참석했다.
미사 후 모라가 중위의 지휘에 따라 병사들은 수비대 공사에 들어갔다. SF만 최초의 이날 미사는 단촐하고 소박했다. 파로우와 캄본 사제는 나무상자와 평평한 돌 위에 제단을 차리고, 제단 위에는 흰 천을 깔았다. 막대기로 자그마한 십자가를 세우고 촛불 두 개를 밝혔다. 구리로 만든 진짜 종 대신 나무를 종 모양으로 다듬은 가짜 종을 사용해 구색을 갖추었다. 야외 미사가 열리는 동안 무장한 병사들이 주위를 경계했다.
미사 후 모라가 중위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북위 37도 79분, 서경 12.46 지점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우선 흙벽돌을 만들기 위해 흙을 나르고, 흙과 갈대, 물을 섞을 재료를 준비했다. 또한 일부 병사는 인근 숲에서 삼나무와 침엽수 소나무를 벌목해 노새나 말로 다듬은 목재를 현장으로 운반했다.
선교원 터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수비대 건설
모라가 중위는 선교원 터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만 북서쪽 끝 금문 해협 남쪽 절벽 위에 수비대를 세우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SF만과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쪽으로는 오늘의 크리시 필드(Crissy Field)가 있고, 서쪽은 퍼시픽 하이츠와 링컨 공원이 보인다. 남쪽은 마리나, 북쪽은 오늘날 금문교 남단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병사들은 1~2에이커(1에이커는 1,224평)의 터에 한 변 길이 250미터, 총 둘레 1킬로미터에 말뚝을 박고, 일부 구간에는 말뚝 안쪽에 흙벽돌 담을 쌓아 울타리를 보강했다. 말뚝은 길이 3~3.6미터, 지름 15~25센티미터의 침엽수 소나무를 사용했다. 말뚝마다 1~1.2미터의 구덩이를 파고 박았으며, 지상에 드러난 길이는 약 17~22.5피트였다. 말뚝 끝은 날카롭게 다듬었다. 말뚝 간 간격은 1~1.5미터였으나, 일부 사료에는 0.3~0.6미터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스페인 군기지는 말뚝으로 경계를 치고, 말뚝 사이에 밧줄을 치는 것이 관행이었다. 또한 수비대 안쪽에는 별도로 높이 1.8~2.25미터, 폭 1미터의 흙담을 쌓았다.
오흐로네 부족, 자진 노동력 제공
수비대 공사에는 병사들 외에도 오흐로네 원주민들의 도움이 컸다. 공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주민 몇 명이 공사 현장을 지켜보았고, 7월 중순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자 만 주변에 살던 오흐로네 부족 20여 명이 자진해 일손을 보탰다. 이들에게는 하루 두 끼의 옥수수죽이나 콩요리, 마른 고기가 제공됐고, 면으로 짠 셔츠 등이 지급됐다.
오흐로네 부족은 수비대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숲에서 병사들을 도와 기둥이나 보로 사용할 참나무, 말뚝과 지붕용 침엽수 소나무, 문짝용 레드우드 등을 벌목했다. 벌목한 나무는 말이나 노새로 운반했으며, 경우에 따라 굴리거나 판자를 받쳐 끌어 이동했다.
2,200개 말뚝과 11만 개 흙벽돌
울타리에 사용된 말뚝은 모두 2,200개였으며, 거처와 토담에 쓰인 흙벽돌은 11만 개에 달했다. 대부분 오흐로네 부족이 제작했다.
6월 27일 병사들과 그 가족 등 45명이 도착한 데 이어, 일부 병사와 가족, 목수·대장장이 등 기능공과 그 가족을 포함한 제2차 정착민 35명이 1776년 9월 17일경 ‘슬픔의 냇가’ 습지에 도착했다. 이들이 합류하면서 정착지는 비로소 마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비대와 선교원 주변에 6~10채의 거처를 마련했다.
영토 점유식과 황제의 깃발 게양
1776년 9월 17일, 제2차 정착민이 도착한 후 SF 수비대 영토 점유 선포 및 정식 기공식이 금문 해협 남쪽 해안가 수비대에서 열렸다. 기념 예배는 파로우와 캄본 두 사제의 공동 집전으로 진행됐으며, 60여 명의 정착민이 참석했다.
알타 캘리포니아에서 파견된 행정 관료(성명 미상)가 “이곳은 위대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영토임을 만방에 선포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두 사제는 성수를 뿌리는 축성 의식을 거행했고, 기념 미사 후 대포와 화승총으로 예포를 발사했다. 이어 수비대가 들어선 정상에 3~4미터 높이의 십자가와 황제의 깃발을 게양했다.
이로써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깃발은 태평양을 오가는 선박들을 내려다보게 됐다. 1542년 스페인 탐험가 카브리요가 산디에이고 일대를 스페인령으로 공표한 지 234년 만에, 알타 캘리포니아 SF만 일대에 스페인의 깃발이 휘날리게 된 것이다.
수비대와 정착촌의 형성
9월 17일 이후 수비대는 사령관과 병사들의 막사, 창고, 화약고, 말우리 등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막사는 길이 6~10미터, 폭 4~5미터 규모로 4~6동이 세워졌다. 병사 막사는 흙벽돌과 통나무로 지었고, 지붕은 나무가지 위에 갈대를 얹었다. 바닥은 다진 진흙으로 마감했으며, 병사들은 침상 대신 갈대 위에서 생활했다. 화약과 곡물 창고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을 높였다. 우리에는 약 70마리의 말을 사육했다.
한편 수비대나 선교원에 거주할 수 없었던 일반 정착민과 여성, 어린이 등 약 60명은 수비대와 선교원 사이 약 1에이커의 초지에 터전을 마련했다. 이들은 약 10채의 거처를 짓고 옥수수, 콩, 밀, 보리, 양상추 등을 재배했으며, 젖소 50여 마리와 일부 양·염소를 방목했다. 일반인은 자유롭게 영내에 출입할 수 없었기에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병사들과 교류하며 생활했다.
아시스의 샌프란시스코 선교원 명명
1776년 10월 9일, 프란시스코 파로우(Francisco Palou) 신부는 선교원 봉헌 미사에서 이 선교원을 ‘아시스의 샌프란시스코 선교원(Mission San Francisco de Asis)’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 선교원이 돌로레스 냇가에 위치해 있다 하여 ‘돌로레스 선교원’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점차 발전하면서 그 많던 늪지대와 연못이 매립되어 주택과 상가지구로 바뀌었고, 오늘날 샌프란시스코 15가와 20가 일대로 발전했다.
이 땅은 본래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버클리, 오클랜드 일대에 거주하던 라마이투스 오흐로네(Ramaytush Ohlone) 부족의 터전이었다. 이들은 약 3천여 년 전부터 이 지역에 약 50여 개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냥과 물개·물고기잡이, 식물 뿌리와 열매 채집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1천여 마리의 가축과 45명 이상의 외지인이 샌프란시스코 반도의 ‘좋은 약초의 땅’에 도착하자, 연안에서 물고기를 잡던 오흐로네 원주민들은 크게 놀라 겁에 질린 채 멀리 달아났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일부 원주민들은 정착민들에게 다가가 양식을 교환하며 점차 친분을 쌓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