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SF만에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첫미사 후 선교원과 수비대 공사시작
첫 미사 후 선교원과 수비대 공사 시작1776년 몬트레이 수비대를 출발한 새로 들어설 수비대 병사와 그 가족과 몇몇 정착 희망자 등 총 60여 명은 일단 돌로레스 냇가의 ‘좋은 약초의 땅인 에르바 부에나(Yerba Buena)’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SF 해안가에 정착할 병사와 가족 등 정착 희망자는 일단 수비대와 선교원 사이 사방 10 내지 20에이커 초원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그곳에 6 내지 8채 정도의 움막을 지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개척지의 영토는 무조건 황실의 소유였다. 정착민은 누구도 땅을 소유할 수 없었다. 정착민들은 주택을 지으려면 관계 당국으로부터 토지 사용 허가를 받아 주택을 짓고 누구에게도 주택이나 집터를 매매할 수 없었다. 다만 이들에게는 자택 근방에 생활에 필요한 자그마한 야채밭을 개간할 수 있었다.
선교원 내에는 영세한 원주민만 거주
당시 스페인 황실의 식민지 정책은 정착 개종에 목적을 둔 선교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선교원은 항상 선교에 필요한 토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세한 원주민은 선교원 내에서 생활할 수 있어도 정착민은 거처할 수 없었다. 정착민들은 선교원의 허락 아래 방목지에서 자신들의 가축을 방목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인에게 토지가 분양된 것은 멕시코 혁명 이후 1821년 이후이다. 이때 멕시코 정부는 개인에게 대규모 토지를 분양하여 란초(Rancho)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정착민들 중 수비대 병사들은 수비대 내의 병사용 막사에서 생활하고 일부 병사는 영내에 거처를 마련한 후 가족과 동거했다. 선교원 측은 정착지까지 몰고 온 말 200여 마리 중 수비대용 70여 마리를 제외한 말 130여 마리와 노새 140여 마리, 소 200여 마리와 양, 염소 등은 선교원 방목장에 풀어 놓았다. 그리고 정착민들은 선교원과 수비대 건설을 도왔다.초기 정착지에는 마을다운 마을이 없었다. 고작 60여 명의 아녀자들과 일부 민간인 정착민들은 수비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병사들과 교류했다. 정착민들은 선교원과 수비대를 세울 때 흙벽돌을 제조할 흙을 운반하고 인근 구릉이나 숲에서 벌목한 목재를 공사 현장까지 운반한 후 기둥보나 지붕, 벽체를 만들 목재를 다듬었다. 그리고 선교원이 제공한 농지에서 즉시 생존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정착민들은 식수를 돌로레스 냇물과 오흐로네 원주민들의 식수를 함께 이용했다. 그리고 인근 야산에서 부지런히 땔감을 마련하는 한편 정착민들이 당장 거처할 움막이나 텐트를 냇가에 마련했다. 그리고 움막을 세울 목재를 북쪽 구릉에서 마련했다.
7월에 접어들자 모라가 중위와 파로우 신부는 수비대와 선교원이 들어설 부지와 마땅한 농경지와 가축을 사육할 알맞은 초지를 찾아 나섰다. 모라가 중위와 파로우 신부는 수비대를 SF 해협 남쪽 입구의 능선 위인 지금의 퍼싱 스퀘어(Pershing Square) 근처의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정했다. 이어 선교원은 돌로레스 호수 부근 지금의 메르세드(Merced) 호수 근방 남동쪽 부근으로 확정했다. 즉 오늘의 데일리 시티(Daly City) 북쪽 메르세드 호수의 구릉 쪽 숲지대이다.
선교원과 수비대 4킬로 사이에 민간인 정착지
수비대와 선교원 간의 거리는 약 4킬로미터. 정착민들은 7월 중순부터 가축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임시 취사장을 세우고 또 곡물을 저장할 창고, 화약을 저장할 구덩이도 마련했다. 이어 본격적으로 선교원을 세우기 위해 나무를 벌목하여 목재와 흙벽돌을 만들 흙을 모으고 담장용 말뚝도 준비했다.정착민과 오호로네 원주민은 인근 러시안 언덕이나 높 힐(Nob Hill), 텔레그라프 힐(Telegraph Hill) 남쪽 숲에서 장장 2 내지 4킬로미터 거리를 힘겹게 운반했다.
1776년 9월 17일경 정착지에 도착한 목수 등 기능공이 중심이 된 2차 정착민은 다음과 같다.보
티스타 알비소(Juan Bautista Alviso)와 그 가족, 미란다(Aplinario Miranda)와 그 가족, 궤레로(Francisco Guerrero)와 그의 가족, 라몬(Ramon Bojorquez)과 가족, 미망인인 마뉴엘(Maria Manuel Pinuelas)과 자녀들, 라 토레(Manuel de la Torre)와 가족들, 발렌시아(Jose Manuel Valencia)와 가족들, 게르투루디스 루엘라(Maria Gertrudis Ruelas)와 친척들 등이다. 이들은 모두 15 내지 20여 가구로 어린 자녀를 포함하여 모두 35 내지 40여 명에 달했다.
돌로레스 냇가에 선교원이 들어서면서 자연 인근에 거주하는 오흐로네 부족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돌로레스 선교원의 첫 영세자는 1777년 6월 24일 약 20세의 차미스(Chamis)라는 추타후이(Chutahui) 마을 청년이 프란시스코 모라가라는 영세명으로 파로우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이날 또한 필모(Pilmo)라는 9세 소년과 타우루(Tauloo)라는 9세 소년과 차미스의 여동생인 11세의 리라테(Lilate)가 각각 영세를 받았다.
또한 1777년 가을에는 근 1,000여 명의 오흐로네 부족이 단체로 영세를 받았다. 영세를 받은 오흐로네 부족들은 선교원 측이 마련한 공동주택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2가족이 한 거처에서 생활하며 농경지나 초원에서 방목하는 가축을 돌보거나 농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옥수수죽이나 마른 고기, 또는 신선한 야채가 하루 2끼 제공되고 때로는 면으로 짠 의상이 공급되었다.
49년 노다지 소동 후 3만 5천여 명으로 늘어
이처럼 샌프란시스코 만을 낀 천혜의 반도에 정착장이 마련되었으나 좀체 정착민은 늘어나지 않았다. 1776년 6월 27일 SF만 ‘좋은 약초의 땅’에 정착민이 자리 잡은 지 60여 년이 흐른 1842년, 인구는 고작 200여 명이 늘어난 375명이었다. 그러나 사크라멘토에 노다지가 터지기 시작한 1848년 가을부터 인구는 갑자기 늘어나 1,000여 명이 되었다. 마침 1849년 노다지 바람이 불자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2만 5천 명으로 늘어나고 1850년에는 34,776명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1860년에는 56,802명, 10년 후인 1870년에는 14만 9천473명, 1900년에는 34만 2천782명, 1930년에는 63만 4천394명으로 늘어나 현재는 근 85만여 명에 이르렀다.
샌프란시스코의 노다지 소동은 1848년 1월 4일 스위스 출신 이주민 쟌 서터(John Sutter)의 제재소에서 시작되었다. 일설에는 스위스에서 금융사고 후 무작정 신대륙 캘리포니아로 이민길에 올랐다는 쟌 셔터는 당시 사크라멘토강 근방에 거대한 농장과 목장을 운영했다. 특히 그는 사크라멘토강 지류인 아메리칸강 근방에 제재소를 운영하며 수로를 찾던 중이었다. 1848년 1월 4일 그의 고용인 마아셜(John W. Marshall)이 황금 조각을 주웠다. 셔터와 마아샬은 이를 비밀에 부쳤으나 그해 가을부터 이 소식은 바람처럼 퍼져갔다. 드디어 전 세계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노다지꾼들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사크라멘토로 몰려들었다. 이 소동으로 서터의 제재소와 농장, 목장 등은 몰려드는 노다지꾼들에게 무참하게 침탈당했다. 그리고 목장의 귀한 가축들도 도난당하면서 그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서터는 당국에 이의 배상을 요청했으나 이도 무산되었다.
이후 이야기를 즐기는 역사가들은 1849년 사크라멘토 노다지 발원지로 가려고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든 노다지꾼을 ‘퍼티 나이너’라고 불렀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풋볼팀의 이름은 ‘퍼티 나이너’이다.
이 같은 소동 끝에 2024년 초 샌프란시스코 인구는 84만 명에 이르렀다. 이제 샌프란시스코는 1800년대의 소규모 선교와 군사의 도시에서 노다지 소동을 겪으면서 서부 해안지대의 무역과 금융의 거점 도시로 성장했다. 이제는 20세기 이후 세계의 테크 산업과 벤처 자본의 성장으로 금융과 첨단 기술, 관광의 복합 경제를 구가하는 고소득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가 되었다.
1769년 10월 4일 (*일부 사료에는 1776년 11월 4일로 기재) 1600년대 초 스페인 탐험가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몬트레이 해안에 있는 천혜의 수비대 부지인 두 개의 거대한 소나무를 찾아 나선 개스파 포톨라는 지금의 산마테오 인근에 이르렀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