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사막의 아이 'SF만'을 향해 말을 달리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프런테라스 요새 부근 3월의 날씨는 쾌적했다. 도도히 흐르는 산타크루즈 강물 내음이 싱그러운 봄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치는 1736년 3월 9일 한 낮, 프론테라스 수비대 사령관 디 안자는 부인 마리아 로사와 함께 강보에 싸인 어린 디 안자를 안고 인근에 있는 산이그나시오 디 꾸귀아라치 (San Ignacio de Cuguiarachi) 선교원을 찾았다. 한 줄기 햇살이 창살을 통해 가늘게 기어든 선교원 내부는 침침했다. 디 안자 부부는 어린 디 안자를 안고 선교원 제대 앞에 마련된 성수를 담은 세례반 앞에 섰다. 성장하는 동안 그의 대부 역할을 해준 로하스 (Roxas) 예수회 신부로부터 영세와 함께 디 안자 2세 (Juan Bautista de Anza2)라는 세례명을 받은 ‘사막의 아이’는 40년의 세월이 흐른 1776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만에 수비대와 선교원 그리고 정착촌을 마련했다.
남편의 무사기원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
디 안자 2세는 소노라 일대의 사막지대 변방 프론테라스 수비대 사령관 디 안자 1세 (Juan Bautista de Anza 1)와 어머니 마리아 로사 베제라 니토 (Maria Rosa Bezerra Nieto)사이 6남매의 자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 로사는 치와와 사막의 변방 야노스 수비대 사령관인 베제라 니토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야노스 수비대 기마대 소위인 디 안자 1세와 결혼했다. 디 안자 1세가 프론테라스 수비대의 사령관에 임명되자 야노스에서 산타크루즈 강 연안 거친 바위틈에 새 둥지처럼 내려앉은 프론테라스 수비대 관저로 거처를 옮겼다. 동이 트기가 바쁘게 인근 정착촌을 약탈하는 아파치를 찾아 수색에 나서는 디 안자 1세의 무사를 위해 마리아 로사는 하루 내내 묵주를 굴리며 디안자 사령관의 무사를 기원하는 기도를 절실하게 바쳤다.
프론테라스 요새는 소노라의 산타크루즈 강변 꾸귀아라치 (Cuguiarachi) 마을에서 수마일 동쪽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바위투성이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내가 남쪽을 향해 흐르는 벌판에는 흙벽돌로 지은 가옥은 뜨거운 사막의 햇살로 하루내내 단단하게 달구워졌다.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정착민들이 장기판처럼 나눈 농토와 관개수로가 대지를 윤택하게하여 정착민들이 흘린 땀만큼 소출을 주었다. 또한 요새동쪽으로는 시에라 마드레 옥시덴탈 (Sierra Madre Occidental)의 험준한 산맥이 자리잡고 있어 정착민들을 사나운 아파치나 항상 저항하는 원주민으로부터 지켜주었다.
병사들 틈에서 자란 ‘사막의 아이’
프론테라스 요새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정착민들의 일상은 평범하면서도 단순했다. 그렇다고 아주 평안하지도 않았다. 흘린 땀에 비례해서 소득을 얻는 정착민들은 해뜨고 해질녁까지 들판에서 작물을 손보고 또한 가축을 돌보았다. 때때로 노다지를 찾아 산야를 헤집기도 하고 지역 민병대에서 마을을 지키려 화승총을 잡기도했다. 어린 디 안자 2세는 이러한 변방의 노다지꾼이나 농부 또는 목동들 틈에서 자랐다. 그리고 해가 뜨면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의 훈련이나 말타기를 보면서 하루 해를 보냈다. 가죽 갑옷을 입고 가볍게 말에 올라 적을 찾아 사막으로 달려나가는 병사들을 막연히 바라보기도했다. 그러나 어린 디 안자가 만 4세가 되기전 수비대 사령관이던 아버지 디 안자 1세가 아파치에 의해 사망하자 어머니 마리아 로사는 가족들을 이끌고 수비대 내에의 연병장 한편에 있던 관사를 떠나 이사했다. 그래도 어린 디 안자는 자라면서 지켜본 병사들의 늠늠한 모습을 잊지 않았다.
사막을 스치는 무심한 바람같은 세월이 흘렀다. 디 안자도 어느덧 16살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꿈꾸던 디 안자는 1752년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복무하던 프론테라스 요새에 봉급도 없는 사관 후보생으로 입영했다. 그리고 1788년 선종할 때까지 장장 55년을 스페인 황실을 위해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그의 외조부 안토니오 베제타 니토 (Antonio Bezetta Nieto)도 1718년 황량한 치와와 사막의 야노스 수비대 사령관이 되면서 인근 거주 정착민을 보호하는가하면 일대의 원주민을 하느님 품으로 인도하는데 힘을 보탠 자애스런 사령관이었다. 아버지와 외조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걸은 디 안자는 군인 이외의 길은 전혀 생각하지않은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디 안자 1세와 마리아 로사 사이에는 어린 디 안자를 포함하여 아들 2명, 딸 4명 등 모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마리아 로사가 디 안자와 결혼할 당시 디 안자는 전부인 소생의 마리아 마뉴엘라와 마리아 게르투루디스인 2 딸이 있었다. 결혼 후 치와와 사막의 야노스 요새를 떠나 남편의 부임지 프론테라스 요새로 이주한 마리아 로사는 1725년 장남 프란시스코 (Francisco)를 낳았다. 디 안자 사망당시 장남은 15세,`13세의 딸 마가리타 (Magarita)와 8세의 호세파 그레고리아 (Jjofa Gregoria) 그리고 만 4살이 안된 디 안자(De Anza 2)를 두었다.
프론테라스 요새는 야노스와 마찬가지로 산타크루즈 강변 바위투성이 산자락에 새둥지처럼 자리했다. 사령관 디 안자는 언제나 해가 뜨는 아침이면 수비대를 이끌고 사나운 아파치로부터 정착민을 지키려 출동했다. 이처럼 남편의 빈자리를 위해 마리아 로사의 하루일과는 묵주를 들고 남편의 무사귀가를 바라는 묵주기도를 천주께 바쳤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주위의 바스크 족 출신들이 많아 바스크 사회의 귀족가문 출신답게 전래되는 전통문화를 가르쳤다. 디 안자는 단 한차례 손위 누이 호세파 그레고리아와 함께 자신들의 일가 친척들이 모여사는 아버지의 고향 바스크 지역을 둘러보았다.
디 안자의 부채탕감에 시달리는 마리아 로사
1740년 5월 어린 디 안자가 채 4살이 되기전 디 안자 1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마리아 로사는 생전 남편이 목장 개설등으로 차용한 선교원의 11헌금 금융관리당국으로부터 상환을 강요받게되었다. 마리아 로사는 남편 사후 프론테라스 요새내 관사를 떠나 디 안자의 사촌 펠립페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는 바소추차 (Basochucha)마을로 이사했다. 디 안자는 무려 1,010 페소를 차용했다. 당시 1페소는 8리알. 1리알은 계란 2개 반 가치였다. 1746년 4월까지 마리아 로사는 부채를 상환하지 못했다. 마리아 로사는 금융당국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디 미란다 (Francisco Xavier de Miranda)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고 이의 변상을 상의했다. 이에 대해 미란다는 채무를 변상할 수있는 방안을 모색하자고 화답했다. 그러나 1747년 2월 2일 소노라 일대를 관장하는 어거스틴 빌도솔라 (Agustine Vildosola) 지사는 마리아의 입장은 십분 이해하나 특정인에게 지나친 호혜를 베푼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빌도솔라 지사는 바스크 부족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스페인 황실이 임명한 엄연한 스페인군의 중장출신이었다. 그는 또한 디 안자의 부친과도 친밀한 사이였을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가브리얼 안토니오 (Gabriel Antonio)는 어린 디 안자의 손위 누이 호세파 그레고리아 (Josef Gregoria)는 그의 대녀였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로써 디 안자의 채무는 어느정도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 로사의 재정상태도 디 안자의 연금과 그가 매입했던 토지의 값이 오르고 투자한 광산이 대박을 치면서 집안은 점차 안정을 찾았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