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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탐험을 끝내고 140일만에 투박에 들어서다, 산 가브리엘 선교원에 도착후 양식 구하려 산디에이고로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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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4월 10일부터 5월 1일까지 
디 안자 사령관은 콜로라도 강까지 돌아갈 대원과 보급품을 실은 말들이 몬트레이에서 목적지 콜로라도 강까지 갈 수 있나 몇차례 계획을 수정해가며 고심했다. 결국 탐험대는 남은 4월까지 3개 무리로 나누어 콜로라도 강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디 안자 사령관과 6명의 병사들은 북쪽으로 향하고 가르세 신부와 12명의 병사와 옥수수가루 등 양식을 실은 노새무리는 콜로라도 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디아즈 신부와 3명의 시종은 산디에이고로 달려가 페레즈 선장에게 식량의 6분지 1을 다시한번 더 청하기로 했다.  

1774년 4월 10일 일요일부터 4월18일 월요일까지 (투박출발 93일부터 101일까지)
가르세와 세라 두 신부가 산디에이고를 떠나 길을 나설 무렵 디 안자 사령관은 42마일을 달렸다. 디 안자 일행은 하루 42마일에서 45일을 달려 몬트레이까지 3백마일 거리를 8일만에 완주했다. 1769년 캘리포니아 초대지사 포톨라 (Portola)와 코스탄소 (Costanso) 공병대위가 달렸던 길은 그만큼 잘 다듬어져 있었다. 마침 내린 비로 산타로사의 강물 (Santa Rosa River)은 세차게 흘렀다. 디 안자와 병사들은 강물이 낮아지기를 기다리며 산타바아바라 해협 인근 원주민들의 생활모습을 살피며 세세히 기록했다. ‘콜로라도 강변처럼 이곳 산타바아바라 해협 인근에도 많은 원주민들이 둥글게 모여살았다. 대부분 주민들은 나체로 생활했다. 특히 여인네는 허리아래를 나무가지나 갈대, 또는 선인장에서 추출한 섬유질로 가렸다. 체격은 모두 단단해보였고 항상 몸에서 활과 화살을 떼지않았다. 그리고 커누를 타고 바다에 나가 집단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라고 디 안자는 기록했다.    
다음날 새벽, 디 안자 일행은 산타로사 강변을 찾았다. 흐르는 물살은 많이 낮아졌다. 그날 일행은 북으로 48마일을 달려 한밤중 산루이스 오비스포에 도착했다. 선교원의 사제와 병사들이 한밤 중 선교원을 찾은 낯선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이들도 산가브리엘 선교원에서 겪었던 비참한 체험담을 쏟아냈다. 디 안자 일행은 잠시 눈을 부친 뒤 새벽이 되자 다시 60마일을 달려 이른 아침 산안토니오 (San Antonio)에 도착했다.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시 말을 달려 오늘의 킹시티와 그린필드 사이의 로스오시토스 (Los Ositos)의 살리나스 강 근방에서 야영했다. 그리고 4월 18일 월요일 몬트레이에 도착했다.
이보다 정확히 일주전인 4월11일 가르세와 세라 두 신부는 산가브리엘 선교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함께 출발하려던 디 안자 사령관은 하루 전 몬트레이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가르세 신부는 디 안자가 자신에게 당부한 명령을 일부 수정한 후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가는 노선을 정했다. 이제 가르세 신부는 세라 신부의 신변안전 문제부터 잔여대원을 지휘하여 소노라로 돌아가는 문제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2일 후 가르세 신부는 잔여대원을 이끌고 콜로라도로 향했다. 디 안자의 지시대로 가르세 신부 일행은 북쪽으로 되돌아가 산안토니오의 ‘곰들의 강’에 도착했다. 한 병사가 마침 곰 한마리를 사냥했다. 일행은 오랜만에 신선한 곰고기를 맘껏 구워먹고 생기를 찾았다. 마침 날씨는 쾌적했다. 가축이 뜯을 풀은 초원에 가득했다. 강변에는 싱그러운 버드나무가 바람에 몸을 떨었다. 눈이 녹아내린 험준한 바위산은 만개한 꽃과 초목으로 싱그러웠다. 일행은 산타아나에서 야영했다. 그리고 그날 21마일을 전진했다.
다음날 일행은 산호세프 (San Jose: 오늘의 산하신토 동쪽)으로 달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행은 예정하지않던  곳을 한참 벗어나 달렸다. 특별히 일정이 단축된 것도 아니었다. 가르세 신부와 일행은 남동쪽으로 다시 달렸다. 그리고 좁다란 계곡에 들어섰다. 산파트리치오 San Patricio)에서 야영했다. 그리고 산가브리엘 지역 언어로 소통이 가능한 원주민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고 메스칼 선인장 음료를 나누어 마셨다. 일행은 원주민들과 어울려 신나게 몸을 흔들며 소리치며 여흥을 즐겼다. 많은 여인네가 이날밤 여흥에 함께 어울렸다.

1774년 4월 19일 화요일부터 5월 1일 일요일까지 (투박출발 102일부터 114일까지)
몬트레이에 도착한 후 디 안자와 일행은 하루내내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4월 20일 수요일 디 안자는 카멜 (San Carlos Borromeo de Carmel) 선교원을 찾아 사제와 환담했다. 특히 최근 해변으로 쓸려온 부러진 돛대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돛대는 어느 종류의 나무로 만들었고 어떻게 설계되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돛대의 맨 상층부는 전혀 녹슨 자국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파손된 배의 돛대를 뉴스페인 산브라 (San Bla)로 보내 어느나라 배의 돛대인지 확인하기로했다. 혹시나 캘리포니아 연안을 지나는 스페인 이외의 제국에게 의심이 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다음날 아침 디 안자는 미사 후 몬트레이 수비대로 돌아왔다. 디 안자는 수비대 사령관 페드로 파제스 (Pedro Fages)에게 자신과 함께 콜로라도 강까지 동행할 병사 6명이 새로운 길을 알아볼 수 있을까 찾아보도록 제안했다. 병사 6명은 4월 22일 아침 몬트레이를 떠나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로스오시토스 (Los Osltos), 산안토니오 (San Antonio), 나시미엔토 (Nacimiento)강 근방에 있는 산루이스 오비스포까지 달렸다. 한편 두 사제는 4월 26일 산타로사 강 하구 근방에 이르렀다.
디 안자 일행이 몬트레이를 다시 찾았을 무렵, 가르세 신부는 카요트 계곡을 따라 산카를로스를 향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일행이 길을 가는 내내 원주민 무리들이 따라붙었다. 남녀 불문하고 어른, 아이를 포함한 한 무리 원주민들은 더 이상 외지인인 스페인 병사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쉽게 스페인 병사들과 어울렸다. 원주민들은 가르세 신부 일행에게 메스켈 선인장 음료수를 계속해서 건넸다. 가르세 신부측은 원주민들에게 유리구슬로 보답했다. 일행은 마을에 들어가서도 원주민들은 외지인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러는 사이 원주민 중 누군가가 예리한 창으로 살찐 말을 마구 찔러 살해했다. 그리고 한밤중 마을 사람들끼리 비밀리에 죽은 말고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경비를 섰던 병사들조차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끔직한 사건을 겪은 가르세 신부 일행은 친절을 베푸는 원주민은 더 이상 믿지않기로 했다. 산그레고리오에서 야영을 끝낸 후 일행은 습지대를 지나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다시 돌아온 가르세 신부 일행을 환영했다. 가르세 신부는 이곳에서 하루내내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가축들의 먹이인 풀과 식수의 질이 좋지않다고 반대했다. 다행스럽게 일행은 산타 오라야까지 우회해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일행은 안내인을 따라 사막을 가로질러 호수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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