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김 원장 라이프칼럼] 아버지 생각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조용히 불러 본다. 새벽 동이 트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멀리서 들려 오는 풀벌레 우는 소리 외에 인기척 하나 없는 조용한 밤, 왜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질까. 세상의 자녀들이 흔히 엄마는 그리워 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은 잊어 버리고 지내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늘 내 편이었다. 겉으로는 내색은 못 하셨지만 나에 대한 편애는 심하셨나 보다. 언니는 엄마에게서 용돈을 받아 내면서 엄마의 잔소리도 들었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직행이었다. 용돈 달라고 하면 무엇이 그리도 좋으신지 슬금슬금 웃으시면서 엄마처럼 따지는 일도 없고, 거절하는 적도 없다. 아버지한테 나도 보상을 해야 되니 산책가자 하시면 나 또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짝 부녀간이었다.
아버지의 고향 경기도 안성에서 당시에는 알아주던 집안이었으니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터인데 시골에 안주하는 것이 싫어서 변화가 필요하셨던 가 보다. 서울에 오셔서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가 만주로 가셨다. 거기서 건국대학교 법과대학을 마치시고 해방과 함께 남하해서 문교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다시 계속 하셨다. 생활이 안정될 만하니 6.25 전쟁으로 피난을 해야 했고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가서 정착했다.
놀랍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이 많은 비운의 역사를 받아 들이면서 자식들을 보호하고 교육시키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까. 어떤 무쇠 같은 힘이 있어서 이 많은 일들을 당연한 것처럼 지켜냈을까. 아버지 시대의 역사는 참으로 경이롭다.
동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아버지를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어려운 법률서류 부탁하는 일, 직장을 위해 추천서 써 달라는 일, 결혼식 주례 부탁하는 일, 땅 문서가 잘못되었다고 고쳐 달라는 일 등 많은 일들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느라 우리 집에는 항상 손님들이 와 있었다. 그들의 부탁으로 오는 손님들인데도 어머니는 쉬지않고 그들에게 다과상을 준비해 드렸다.
집에 오는 손님들을 소홀히 대해서는 못쓴다는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와 함께 동네에 나가면 모두들 공손하게 아버지께 인사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괜히 기분이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나이가 다 찬 딸자식인데도 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영락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신다.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들고, 늦으면 늦는다고 기다리신다. 다 큰 딸을 어린애 다루 듯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싫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챙피했다.
친구들과 놀다 늦게 돌아오는 것이 죄송스러워서다. 아버지, 못난 딸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더 흔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미국에 살면서 싫은 이유가 한가지 있다. 아버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김포에 있는 합장된 장원묘지에 마음대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동네에서 소문난 금슬좋은 부모님은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는 힘을 잃으셨다. 시름시름 건강을 잃어 가셨다. 얼마되지 않아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병명도 없는 시름병, 외로움과 고독의 병이라고 믿어진다.
생전에 말씀이 “부모님 여의고 나면 효도하고 싶어도 못한단다.”
미국에 와 있다는 핑게로 효도같은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이 불효한 딸은 어떻게 부모님 가서 뵐 수가 있을까. 부모님의 연세만큼 나이를 먹으니 효도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네.
어렸을 때 부터 조목조목 따지면서 옳고 그른 것을 잘라 말하던 딸이 “안 사돈댁 앞에서도 저렇게 따지고 살면 어쩌나” 염려되어 삼강오륜을 가르쳐 주시던 아버지.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 다오” 짧은 가르침을 주시던 아버지. “아무일 없이 잘 살고 있으니 염려마세요. 아버지가 염려하시던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모님 묘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 참 이상하지요? 어떻게 김 서방(남편) 하는 일이 꼭 아버지가 제게 한 것처럼 행동을 해요.”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에 오늘은 하루종일 눈이 젖어 있을 것 같다.
4. 11.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