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김 원장 칼럼] 10월의 마지막 밤을

10월이면 유난히도 많은 일들이 생각난다. 지금 살고 있는 피닉스는 일년의 반을 후끈거리는 여름으로 지내려니 몸도 마음도 후끈거려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정상으로 지낸다는 것은 겨우 문명의 혜택을 받아 고도의 기술로 집 안에 설치된 냉방시설 덕분이다. 10월은 그래서 더 꿀맛 같다고 할까.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산뜻한 공기가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아침 이슬로 풀잎에 맺혀진 조그마한 물방울을 보는 것 만으로도 하루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피닉스에서의 귀한 가을로 접어드는 10월, 서울의 여의도 길에서 보던 노란 은행나무의 단풍을 볼 수는 없어도 아리조나의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해 주는 세도나의 단풍이라도 볼 수 있는 10월. 그 10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10월의 마지막 밤을 캘리포니아의 바닷가에서 보내고 있었다.
2009년 10월 31일, 이틀 후에 헤어져야 할 평생 친구 3명과 함께 나의 비밀 아지트라고 늘 말하는 샌 시미온 해변 모래밭에 앉아서 여자들 4명의 하고 싶은 말들은 모래사장 만큼이나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서울에 어쩌다 나가 보아야 겨우 잠간 만나고 오는 것으로 우리들의 만남은 언제나 몹시도 허기져 있었다. 이제는 모두들 은퇴했고 아이들도 다 나갔으니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유있는 친구들이다. 대학교수로 은퇴한 경은이, 아직도 조금씩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변호사 광자, 약사로 은퇴한 화자, 그리고 아리조나의 촌사람이 된 나, 이렇게 4사람은 13살 때 부터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서운하다면 그들은 모두 서울에서,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멀리 있어도 마음만은!! 하고 위로해 주지만 아무때나 부르면 달려 나오던 그들이 없는 이곳은 항상 나를 외롭게 만든다.
생명을 위협하는 수술은 아니었지만 내가 두 번의 수술을 받은 후 이들은 모의를 시작했다. 언제 다시 우리가 다 모일지 모르니 친구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가자는 모의. 경은이 딸이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어 그곳을 집결지로 삼고 3명이 가방을 쌌다. 모두 처음 만난 남편과 톡탁거리면서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미국에 친구 만나러 간다는 그 정도의 호사는 누릴 줄 아는 친구들이다. 드디어 넷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원없이 재잘댄다. 힘들었던 시절, 행복했던 순간들, 손을 잡고 모래 밭을 걸었다. 경복궁 뒷뜰의 단풍잎으로 소복히 덮인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친구들, 옛날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바닷길을 걸었다. 쉬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젊었을 때 즐기던 시절보다 더 흠뻑 즐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이렇게 즐길 수 있는거야?” 평소 말이 적은 광자가 기쁨에 넘쳐 한마디 던졌다. 귀요미 화자가 질세라 “이런 시간이 평생 어디 또 있겠어?” 경은이도 한마디 빠지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같은 친구들 없어. 오죽하면 여기까지 왔겠어?” 고마운 친구들.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는 친구들. 이들 때문에 피닉스에서의 삶이 외로워도 위로가 되었고 힘을 얻었지!!
이틀째 되던 날, 다시 만나 저녁을 먹고 해변으로 나갔다. 말리브 해변에 앉아서 헤어져야 할 작별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용이라는 가수는 10월을 “잊혀진 계절” 이라고 노래했지만 나에게 10월은 잊을 수 없는 계절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역시 재치있는 화자가 노래를 시작하니 모두가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끝내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태평양 바다의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와 맑은 밤하늘의 별들이 우리를 보고 있음에도 나이찬 여자들은 부끄러움도 없이 계속 노래를 부른다.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노래를 계속하면서 기어이 우리는 부둥켜안고 소리내어 울고야 말았다. 그래도 노래를 계속했다.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내가 시작한 노래에 우리는 가슴에 쌓였던 눈물의 절정을 보였다. “이제 보니까 너희들 강산이 몇번 변하는 세월을 보냈건만 하나도 안 변했네.!!” 내가 한마디 했다. 어린시절의 그 예쁜 감정들을 고스란히 속에 간직한 채 살아 온 그들의 모습이 한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 주는 친구들, 그들과의 변함없는 우정이 나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준다. 잊을 수 없는 10월의 마지막 밤.
10. 27. 2014
아리조나 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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