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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아리조나] 바다 안개너머 샌프란시스코 만이 보인다 -이범용(시인, 전 여성지 '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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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것에 실려 산디에이고 만에  도착한 세라 신부
포톨라가 지휘하는 육상탐험대는 로레토(Loreto)에서 35마일 밖 벨리카타  (Velicata) 마을에서 탐험대 편성을 마무리했다. 포톨라는 육상탐험대를 둘로 나누어 선두로 나설 제1대는 로레토 수비대 대위 페르난도 리베라 몬카라(Fernando Rlvjera y Moncala)가 지휘봉을 잡았다. 3월 24일 출발한  선두부대는 마차가 통행할 수 있게 도로를 보수하는 한편 근처 발호하는 원주민들로부터 탐험대를 경호했다. 리베라 대위가 지휘하는 제1진에는 후앙 크레스피 (Juan Crespi) 신부가 기록관을 겸해 동행했다. 포톨라 총독이 이끄는 제2진은 5월14일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세라 신부는 벨리카타에 선교원을 세웠다. 보급품을 가득 실은 노새와 탐험에 동행할  원주민 시종과 정착민, 병사 등 많은 대원과 함께 벨리카타를 출발하여 400마일 거리의 산디에이고로 향했다. 장거리 여행에 다리와 발에 이상이 생긴 세라 신부는 끝내 들것에 실려 목적지 산디에이고에 도착했다. 
4개조로 분산하여 바하캘리포니아의 로레토 요새겸 선교원을 출발한 알타캘리포니아 탐험대는1769년 7월 1일 탐험대를 재편성했다. 탐험대는 오늘날 산디에이고 요새의 언덕 (Presidio Hill)에 대원들의 임시거처인 야영지를 마련했다. 1769년 7월 16일 프란시스코 교단의 페르난도 파론 (Fernando Parron)을 비롯하여 프란시스코 고메즈 (Francisco Gomez), 후니페로 세라 신부는 사제단 공동으로 알타캘리포니아에 처음으로 들어설 요새와 선교원 부지를 축성한 후 산디에이고 디 알카라 (San Diego de Alcala)선교원 신축 첫삽을 떴다. 이어 사제단과 일부 정착민은 꺾어온 나무가지로 간이 성당을 마련했다. 또한 정착민들은 새 선교원을 지을 흙벽돌을 준비했다. 이때까지 산카를로스와 산안토니오를 타고온 정착민과 병사들 일부는 험한 뱃길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고생중이었다. 또한 보급품을 싣고 먼저 출항한 보급선은 어느 바다에서 폭풍에 난파되었는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몬트레이 찾아 하루 5내지 10마일 북진
선교원 신축 이틀전인 7월 14일 포톨라 총독은 63명의 건장한 병사와 노새몰이꾼, 시종, 바하출신 원주민 통역 등 모두 74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167년 전 비즈카이노 탐험가가 발견한 후 잠시 머문 몬트레이 (Monterey)만을 향해 출발했다. 비즈카이노 이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톨라 총독이 몬트레이를 찾아나섰다. 보급품을 무겁게 실은 노새 10마리가 뒤따르고 후앙 크레스피 신부가 기록관을 겸해 동행했다. 일행은 하루 5마일에서 10마일 정도 속력으로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지의 땅에 발길을 남겼다. 74명의 전 대원은 1769년 7월 28일 오늘의 산타아나 강 근방에서 지진을 겪었다. 그리고 7월 29일 풀러톤 (Fullerton) 그리고 7월 30일에는 북 하보르 불바아바드 (North Haborbor Boulevard)에 있는 푸엔타 언덕 (Puenta Hill)을 넘었다. 그리고 탐험대는 다리를  만들어 산가브리엘 (San Gabriel) 강을 건넌 후 북서쪽으로 전진했다. 이 다리를 건너 일행은 근처 라푸엔타라고 부르는 시를 끼고 지났다.

1679년 8월 2일 유럽인 최초 오늘의 LA에 도착
8월 2일 로스안젤레스 강과 아로요 세코 (Arroyo Seco) 강이 만나는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했다. 다음날 계속 북상한 탐험대는 원주민들이 통행하는 오솔길을 지나 오늘의 산타모니카 (Santa Monica)인 윌사이어 (Wilshire)를 지났다. 오늘날 산타클라라의 일부인 사우구스 (Saugus)를 돌아 8월 19일 오늘날 산타바아바라 (Santa Babarar)로 발전한 황량한 들판에 도착한 탐험대는 9월 13일 오늘의 산시에몬 (San Siemon)에 도착했다. 그러나 해변이 너무 가팔라 이곳에 야영장을 차릴 수 없어 부득이 내륙으로 들어섰다.

“짙은 바다안개 사이로 광활한 만이 보인다”
부득이 일행은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 산안토니오 계곡을 지나 10월 1일 산타루시아 산 줄기를 타고 살리나스 (Salinas) 강 하구에 이르렀다. 포톨라가 지휘하는 대원은 산디에이고로부터 근 400마일 그리고 처음 출발한 벨리카타로부터는 1,000마일을 행군하고 드디어 목적지 몬트레이 만에 도착했다. 그러나 포톨라 총독은 몇차례 만 연안을 살펴도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원형처럼 생긴 천혜의 요새는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비즈카이노는 분명 ‘0’ 모양의 만이 있다고 탐험일지에 기록했다. 일행은 해변을 따라 몇차례나 반원형 모양의 천혜의 요새를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탐험대는 다시 비즈카이노가 언급한 요새를 찾아 북으로 다시 발길을 돌려 만의 북쪽 끝자락에 도착했다. 10월 18일 크레스피 신부는 이곳을 지나는 작으마한 여울을 산타크루즈라고 이름지었다. 계속 전진한 탐험대는 10월 31`일 자그마한 강인 오늘의 산페드로에 도착한 후 이곳에 야영장을 꾸리고 4일간 머물면서 그간의 여독을 달랬다. 11월 1일 호세 프란시스코 오르데가 (Jose Francisco Ordega)가 소규모 탐험대를 이끌고 근처 얕으막한 스위니 리지 (Sweeney Ridge)에 올랐다. 오르데가와 동행한 병사들은 산정상에서 바다안개 사이로 광활한 샌프란시스코 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 대하는 엄청난 규모의 너른 만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만은 몬트레이 만과 달리 알타캘리포니아 정착촌 건설에 결정적 역활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만은 금문교 일대를 제외하고 사방이 육지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몬트레이 만과는 달리 거친 조류에 전혀 노출되지않았다. 이처럼 훌륭한 만은 짙은 안개때문에 까브리요나 비즈카이노 하물며 아시아와 태평양을 지나 멕시코에 기항하는 각종 상선들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샌프란시스코 만이 일찍 발견되었다면 샌프란시스코 만 주변에는 정착촌이 들어서고 또한 안전하고 편리한 항구도 개발되어 스페인은 더 강력한 해양강국으로 세계를 장악할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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